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종중소식] 의안대군(義安大君) 5 대조 이양무(李陽茂) 준경묘*濬慶墓)·대제 참반

정다운1004 2016. 2. 8. 07:38



의안대군(義安大君) 5 대조(大祖) 이양무(李陽茂)

준경묘*濬慶墓)·영경묘(永慶墓) 대제 참반





















준경묘(濬慶墓) · 영경묘(永慶墓)


[요약]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李陽茂) 장군과 그 부인의 묘
[주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92, 98, 산 149, 하사전리 산 53


1981년 8월 5일 강원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7월 12일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었다. 준경묘는 목조의 아버지 양무(陽茂) 장군의 묘, 영경묘는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이다. 1899년에 두 무덤을 수축하여 제각, 비각을 건축하였다.


묘소 일대는 울창한 송림이 원시림 상태로 우거져 있는데 특히 이곳 송림은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하였다.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이며 해마다 4월 20일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지낸다.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된 뒤 1984년 8월에 삼척군(지금의 삼척시)에서 제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다. 묘에 관하여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에 부모를 안장한 이후 5대에 이르러 조선(朝鮮)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개설]

이양무는 고려시대 인물로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이다. 그의 부인인 삼척이씨는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목조가 전주를 떠나 강원도로 이주할 때 이들도 함께 동행하였다고 전한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 그리고 대한제국기인 1899년에 이르러 황실에서는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동산의 부인 무덤을 영경묘(永慶墓)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傳說)]

  태조 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穆祖)께서 부친(이양무) 상(喪)을 당하여 묘지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헤매다가 지금의 준경묘(濬慶墓)가 위치한 노동(盧洞)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한 도승(道僧)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혼자 말로 “참 좋구나, 대지(大地)로다” 하는 것이었다.

  목조께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도승은 이처럼 탄성을 올리면서 계속해서 “그렇지만 개토제(開土祭)에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棺)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葬事)를 지내야 하겠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 하는 말을 남기고 수 백보를 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목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이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목조께서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렇다!” 손바닥을 친 이안사는 소 일백마리는 흰 소 한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百)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인과 의논을 하였다. 부인에게는 다른 말을 일체 하지 않고, “내일 밭갈이를 할 터이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 오시오” 라고만 하였다.

  다음날 친정에 가서 흰 소를 몰고 부인이 오자 이 소를 잡아서 제물(祭物)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는 부친의 귀중한 영가(靈駕)를 넣은 관에 씌울 금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였는데,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1231년 부친의 장례를 치른 묘가 지금의 준경묘라고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