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의안대군(義安大君) 일대기(一代記) 출생(出生) 과 군호(君號)

정다운1004 2016. 1. 4. 21:50

 

    의안대군(義安大君) 일대기 요약 (종친회에서 옮겨온 자료)

 

 1. 忠穆王 4년 戊子年(1348)에 桓祖와 定安翁主 金氏의 所生으로 함경도 화녕부 흑석리에서 誕生하셨다.

     태조가 의안대군의 서형이다.

 2. 諱는 和요 號는 二樂亭이며 諡號는 襄昭이다.

 3. 桓祖는 元國의 千戶로 있다가 恭愍王과 미리 약조하고 高麗의 軍士들과 내응하여 1356年 雙城摠管府를 탈환함으로

     고려의 大中大夫司僕卿과 朔方道萬戶 兼 兵馬使, 平章事 等을 歷任하였다.

 4. 恭愍王이 늘 곁에 두고 食事도 함께하며 그 母親 定安翁主도 각별히 배려하였다.

     약관에 대장군이 되어 왜구와 홍건적을 토벌할 때 혁혁한 공을 세우셨다.

 5. 桓祖는 死後 門下侍中에 贈職되었고 朝鮮 桓祖 淵武聖桓大王으로 追尊 되었다.

 6. 우왕 十四년 威化島 回軍때 公은 助戰元帥로 先鋒에 서 太祖를 적극 도왔다.

 7. 太祖 一년 七월十六일 公은 배극렴 조준 정도전 등 대소신료들과 같이 國璽를 받들고 太祖 저택에 나아갔다.

     이달十七일 太祖가 수창궁에서 즉위하였다.

 8. 이달 二十八일 太祖가 문하부에 교지를 내려 공을 佐命開國功臣 商議門下府事 義興親軍衛都節制使 義安伯으로 除授하고

     九월二一일 紀功敎書와 錄劵을 받으니 국보 제二三二호이다.

 9. 太祖 二년 二월九일에 임금이 새로운 도읍지의 山水와 형세를 관찰하시고 公에게 성곽을 축조할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10. 동년 七월二十二일 회군일등공신을 받았다.

11. 太祖 六년 十월六일에 가례도감을 설치할 때 公은 領三司事로서 提調가 되었다.

     太祖 七년 九월一일 判門下府事 겸 領義興三軍府事 義安公이 되었으며

     동년 十월一일 화란을 평정하고 임금을 보좌하여 사직을 안정시킨 그 공로가 커서 정사일등공신의 녹권을 받았다.

12. 정종 一년 四월一일 새로운 도읍지의 종묘로 가서 고유제를 섭행했으며 동년 十二월一일에 領三司事가 되었다.

     태종 一년一월十五일 익대좌명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동월 二十五일에 公 侯 伯의 칭호를 바꿔 義安公을 義安府院大君으로 고쳐 봉했다.

13. 동년 二월二十五일 임금이 북정에서 좌명공신들에게 잔치를 베푸시고

     의안대군과 좌명공신 삼등에 錄勳된 그의 차남 完川君 淑 등을 불러 교서와 녹권과 사패를 주었다.

     이것이 숙종대왕 어필 兩世元勳의 뜻이다.

14. 公은 태종 七년 七월四일에 영의정이 되셨으나 八년 一월三일 영의정을 사직하고 동년(1408) 十월六일에 돌아가시니

     조정에서는 三일 동안 철조하고 태종이 친립하시어 부의를 내리시고 시호를 襄昭라 追贈하였다.

15. 공은 순박하고 용감해서 어려서부터 太祖를 잠저에 모시어 좌우를 떠나지 않았으며

     매양 정토에 따라다녀 여러 번 전공을 나타내서 마침내 開國功臣이 되고 정사좌명의 열에 참여하셨다가 돌아가시니 나이 六十一세다.

16. 종묘 태조고황제의 공신당 배향 되셨다.

17. 묘터는 무학대사(묘적선사)가 태조의 능(동구릉)터를 보러 왔다가 잡아주었다.

     후에 무학대사가 금강산에서 돌아가시자 의안대군은 유해를 양주 회암사로 모셔와 봉안했다.

18. 단종사화로 인하여 묘소와 신도비 및 제청을 모두 실전 하였더니,

     純祖가 후손들에게 찾으라 명하시어 純祖 二十三년 九월에 여러 후손들이 일제히 묘소를 찾았다.

     후손 鍾呂와 豊呂와 昌文이 천마산 백봉 아래에서 옛 무덤을 발굴했다.

     그러나 비석과 지석을 찾을 수 없었다. 다행히 부서진 비석은 서 있고 깨진 석물은 제 자리에 있었다.

     그 해 겨울에 十五대 종손 應呂가 의안대군이라는 네 자의 금 글씨를 광중에서 찾았다.

     다음해 봄에 宗孫이 朝廷에 公의 무덤을 다시 만들어 달라고 탄원했다.

     그 해 五월에 純祖가 승지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 다음해 봄에 다시 物力과 石物과 祭廳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허락했다.

     그 해 十월에 경기감영에서 사방 산의 경계를 설치하고 무덤을 지키는 수호군 七명을 파견하여 관리하게 했다.

19. 후손으로는 단종사화로 순절하신 좌찬성 하령군 이양 외 15인이 있으니

     숙종 임금이 兩世元勳一門夸節이란 어필을 내리고 장릉 충신단과 공주의 초혼각 및 요당서원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20. 또 3.1독립만세 운동시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이시고 건국 후 돌아가시자 사회장으로 장례를 치룬 이명룡장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