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 개국공신녹권(李和 開國功臣錄券)

정다운1004 2016. 1. 4. 21:45

1. 문화재청 기록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기록

3. 국가기록유산(www.memorykorea.go.kr)의 기록

4. 이화개국공신녹권 원본의 한글번역본과 원본사진을 여기에 옮겼습니다

 

 

【이화 개국공신 녹권(李和 開國功臣錄券)】

 

요약하면 : 1392년(조선 태조 1)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이화(李和)에게 내린 공신녹권이다

정식명칭 : 의안백이화개국공신녹권(義安伯李和開國功臣錄券)

 

 

종   목 : 국보 제232호
명   칭 : 이화 개국공신녹권 (李和 開國功臣錄券)
분   류 : 기록유산 - 문서류-국왕문서/ 교령류
수   량 : 1축
지정일 : 1986.10.15  
시   대 : 조선신라
소재지 : 전북 정읍시 
소유자 : 이종섭  
관리자 : 이종섭


      공신녹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로, 개국공신록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는데 공헌한 신하들에게 내린 것인데 이 문서는 조선 태조 1년(1392)에 조선개국에 공을 세운 이화에게 내린 녹권이다. 

 

      이성계의 아버지 환조(桓祖)는 서자 2명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바로 이화이다.    이화(李和)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이모제(異母弟)로 개국(開國)에 공이 많아 태조 원년(1392)에 개국일등공신(開國一等功臣)에 책봉되고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으며.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고, 도합 570결(結)의 공신전을 받아 조선 초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태조 7년(1398) 정사공신, 정종 2년(1400) 좌명공신에 오르고, 태종 7년(1407)에는 영의정에 이르렀고 대군(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사후(死後) 태조의 사당에 함께 모셨다.

 

      크기를 보면 세로 35.3㎝의 닥나무종이 9장을 붙여 전체 길이가 604.9㎝에 이르며, 본문 앞 여백의 바깥쪽을 장식하고 보호하기 위해 33㎝의 명주와 안쪽을 보강한 명주는 부식되어 없어진 두루마리이다. 필사본이며 1986년 10월 15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내용을 보면 녹권을 받는 사람의 성명에 이어 공신들의 공신사례, 공신 및 그 부모, 처자 등에 대한 표상과 특전이 묵서로 기록되어 있다.  위화도(威化島) 회군과 정몽주(鄭夢周) 등 반대파 제거에 기여하여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의 이모제(異母弟) 이화(李和)를 배극렴(裵克廉)·조준(趙浚) 등 다른 16명의 건국공로자와 함께 1등 순충분의 좌명개국공신(純忠奮義佐命開國功臣)에 올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공신전(功臣田)의 사급(賜給)과 자손들의 음직(蔭職), 범죄의사면 등 그 특전이 본인은 물론 부모·처자·자손에까지 이르고, 아들이 없을 경우 사위·생질이 이를 계승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녹권의 첫머리와 접지 부분에 ‘이조지인’이라고 도장을 찍었다.

 

      조선의 개국과 관계되는 공신녹권은 개국원종공신녹권(開國原從功臣錄券:국보 69)을 비롯하여 7종이 전하지만, 이보다 상위인 정공신녹권(正功臣錄券)으로는 이것이 최초로 발견된 유일의 실물이다   조선왕조에서는 처음으로 발급된 녹권이며  개국공신녹권으로는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조선 태조의 건국이유와 그 주역들의 공적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일 뿐 아니라 이두가 많이 사용되어 고문서학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이 문서는 이화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가문에 의해 보관되어 오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문화재명 :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義安伯李和開國功臣錄券)

 

조선태조(朝鮮太祖)는 건국(建國)한 다음 달인 태조원년(太祖元年)(홍무(洪武) 25,1392) 8월 2일 공신도감(功臣都監)을 설치(設置)하고 개국(開國)의 계책(計策)과 의거(義擧)에 참여하여 그 대업(大業)을 성공으로 이끈 공신(功臣)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하였다.

 

먼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대한 위차(位次)를 심정(審定)하였는데, 고려우왕(高麗禑王) 무진년(戊辰年)(1388)의 요양회군이래(遼陽回軍以來) 자기(自己)에게 뜻을 두고 어려운 고비를 겪으면서 충성을 다한 공훈(功勳)을 1·2·3등위(等位)로 세분(細分)하였다.

 

그리하여 1등은 좌명개국공신(佐命開國功臣), 2등은 협찬개국공신(協贊開國功臣), 3등은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의 칭호(稱號)를 매겨 교서(敎書)와 녹권(錄券)을 내려주는 한편, 그 등위(等位)에 따라 차등있게 각종의 포상(褒賞)과 특전(特典)을 베풀어 주었다.

 

또한 그 은전(恩典)은 공신개인(功臣個人)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처자(父母妻子), 무자(無子)인 경우는 생질(甥姪)·여서(女壻)그리고 후손(後孫)들이 죄(罪)를 범하였을 경우는 영원히 사면(赦免)될 수 있는 특권(特權)에까지 미쳤다.

 

이 녹권(錄券)의 사급자(賜給者)인 의안백(義安伯) 이화(李和)는 바로 1등공신(1等功臣)에 서열(序列)되었다.

 

그는 조선태조(朝鮮太祖) 이성계(李成桂)의 서제(庶弟)로서 고려공민왕(高麗恭愍王)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고, 우왕무진년(禑王戊辰年)(1388)의 요양회군시(遼陽回軍時)에는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인 형(兄) 성계(成桂)의 휘하(揮下)에서 조전원사(助戰元師)로 활약(活躍)하였다. 이때 그는 형(兄)의 계책(計策)에 따라 회군(回軍)하는 것이 천조(天朝)에 대한 도리이며 이를 어기면 우리 백성들이 살아 남을 수 없음을 설득하여 대의(大義)를 따르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건국(建國)의 과정에서 완강한 반대세력인 정몽주(鄭夢周)를 제거(除去)하는 데 있어서도 이제(李濟)와 더불어 큰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말선초(麗末鮮初)에 대장군(大將軍) 또는 절제사(節制使)로서 왜구(倭寇)를 소탕(掃蕩)하는 데 공헌하였고, 관직으로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영삼사사(領三司事)의 고위요직(高位要職)을 역임(歷任)하였으며, 태조7년(太祖7年) 무인(戊寅)(1398)과 정종2년(定宗2年) 경진(庚辰)(1400)의 1·2차 왕자난(王子亂) 때에도 또한 수훈(殊勳)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각각 서열되기도 하였다.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원종공신녹권(原從功臣錄券)은 정진(鄭津)·김회련(金懷鍊)·장관(張寬)·김천리(金天理)·한노개(韓奴介)·심지백(沈之伯)에 사급(賜給)된 것과 첫머리를 잃어 사급자(賜給者) 말상(末詳)인 것을 합친 7종이 전래(傳來)되고 있지만, 개국(開國)의 정공신녹권(正功臣錄券)만은 이것이 최초로 발견된 유일(唯一)의 실물(實物)인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귀중하게 평가된다.

 

녹권(錄券)에 수록된 공신(功臣)들의 공로사례(功勞事例)와 등차적(等次的)인 특전(特典)에 관하여는 그 기록이 실록(實錄)에도 나타나고 있지만,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의 체재를 갖춘 본문(本文) 내용은 이것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녹권(錄券)은 건국초기(建國初期)에 설치운영(設置運營)된 공신도감(功臣都監)의 연구(硏究)와 본문(本文)에 쓰여진 이두(吏讀)의 연구(硏究)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1392년 이화(李和) 개국공신녹권(開國功臣錄券)

 

분류 고문서-교령류-공신녹권 / 국왕·왕실-교령-공신녹권

작성주체 발급: 공신도감(功臣都鑑) /수취: 이화(李和)

작성지역 한양 / 서울특별시

작성시기 1392년 / 홍무25년 9월 일

형태사항 크기: 35.3×604.9 / 권자장, 1축 / 종이 / 한자, 이두

인장서명 吏曹之印 9개(6.5×6.5, 적색, 정방형)

서명(개) 착명:20

소장정보 원소장처 : 정읍 연지동 전주이씨 이원계 후손가

             현소장처 : 정읍 연지동 전주이씨 이원계 후손가

 

비고 정서본 : 『朝鮮前期古文書集成-15世紀篇』(鄭求福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7),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朴盛鍾,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1392년 이화 개국공신 책록 문서

 

1392년(태조 1) 9월에 이화를 개국공신으로 책록하는 증서이다. 이화는 개국공신 1등위에 해당하는 순충좌명개국공신에 책록되었고, 이 때 그의 부모처자뿐만 아니라 조카, 사위의 품직을 올려주고 밭과 노비 등을 하사하였으며, 후손에게는 면죄의 특권까지 부여하였다. 본 문서에는 수취인의 성명과 신분을 비롯하여 여러 공신들의 공적과 포상 및 처리 내용, 수취 대상 44명의 명단 및 포상 내용, 담당관원의 직함 등이 170행에 걸쳐 기술되어 있다.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발급한 공신녹권으로서 현전하는 개국공신녹권 중 정공신에게 발급한 유일 자료이다.

 

 

1392년 9월에 태조가 이화를 순충좌명개국공신으로 책록하면서 포상 내역을 기록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392년(太祖 1) 9월에 李和를 開國功臣으로 책록하는 증서이다. 崇祿大夫 商議門下府事 兼行義興親軍衛事 義安伯 이화는 개국공신 중에서도 1등위에 해당하는 純忠佐命開國功臣에 책록되었고, 이 때 그의 부모처자뿐만 아니라 조카, 사위의 품직을 올려주고 밭과 노비 등을 하사하였으며, 후손에게는 면죄의 특권까지 부여하였다. 본 문서에는 수취인의 성명과 신분을 비롯하여 여러 공신들의 공적과 포상 및 처리 내용, 수취 대상 44명의 명단 및 포상 내용, 담당관원의 직함 등이 170행에 걸쳐 기술되어 있다.

 

조선 태조는 건국한 다음달인 1392년(태조 1) 8월 2일에 공신도감을 설치하고, 개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포상하였다. 이 때 그 공적에 따라 정공신과 원종공신으로 나누고, 각각 공적에 따라 등급을 세분화하였다. 정공신은 1388년(홍무21) 요양에서 회군한 이래 자신에게 충성을 다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 공훈에 따라 1등은 좌명(佐命), 2등은 협찬(協贊), 3등은 익대(翊戴) 세 등위로 매겨서 교서(敎書)와 녹권(錄券)을 내려주는 한편, 각종 포상과 특전을 베풀었다. 이 때 각 공신들의 공로와 포상 내용을 증명하기 위하여 공신교서와 공신녹권을 하였는데, 이 문서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본 문서는 9장의 종이를 이어붙여서 두루마리 형태로 제작하되 밖으로 노출되는 부분은 명주로 감싸서 보호한 것이 특징이다.

 

이화는 태조의 이복동생으로 定嬪 李氏(婢 古音加) 소생이다. 1388년(홍무21) 요양에서 회군할 때 右軍都統使인 이성계의 휘하에서 助戰元師로 활약하면서 회군의 정당성을 설파하였으며, 1392년(공양왕4)에는 반대세력 정몽주를 제거하는 데 가담하였다. 또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데 참여하여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안백에 봉해졌다. 당시 그에게 발급된 본 녹권은 그에게 후손이 없었던 까닭에 이복형 이원계의 가문에 보관되어 왔다.

 

이후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운 공으로 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에 다시 공을 세워 佐命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전후 4차에 걸쳐 공신에 피봉되어 총 570결의 땅을 받아 조선 초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문서는 조선 왕조에서 처음으로 발급한 공신녹권으로서 현전하는 개국공신녹권 중 정공신에게 발급한 유일 자료이다. 그러므로 조선 초기 공신에 대한 녹훈 제도를 비롯하여 녹권의 서식, 인장, 서체 등 문서의 변천 과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국보 제232호 의안백이화개국공신록권

『朝鮮前期古文書集成-15世紀篇』, 鄭求福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7

『朝鮮初期 古文書 吏讀文 譯註』, 朴盛鍾,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1차 집필자 : 국가기록유산(www.memorykorea.go.kr), 2차 집필자 : 김봉좌

 

 

 

국보 제232호 문화재 정식명칭

"의안백 이화 개국공신녹권(義安伯 李和 開國功臣錄券)"

              한글역(譯) 한글번역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