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한(翰)"의 묘역(墓域) / 조경단(肇慶壇)

정다운1004 2016. 1. 5. 02:54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한(翰)"의 묘역(墓域)

조경단(肇慶壇)


조경(肇慶)'이란 말은 `경사(慶事)가 시작된다'는 뜻으로
기쁨이 비롯되는 우리 전주리씨 의 시조의 단(壇) 이름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이 조경단은 바로 전주의 진산인 건지산 왕자봉(王字峯)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 나라 선원보략(璿源譜略)>에는 시조의 묘소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 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태조고황제가 나라를 연 직후에 그 산을 봉하여 지키게 하고, 전라도 책임자에게 잘 받들어 보살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전의와 읍지에 이렇게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고
    태조고황제와 영조대왕의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그 정성은 문헌으 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 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이에 금년 봄에 재신(宰臣)을 보내어 왕자봉(王字峯) 아래 진좌(辰座) 언덕을 살펴보려 하였더니
    전설에 내려오는 대로 아래 위로 무덤의 형체가 있다 하므로 사방으로 산의 경계를 정하는데
    정조대왕은 산을 봉하여 수호하던 절차에 따라 양지척(量地尺)으로써 땅을 측정했다.

 

    동서로는 3,360척이요 남북으로는 3,520척이다.
    또 영건청(營建廳)을 설치하도록 명하여
    산소 형체의 앞에다 제사지낼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라 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제사 지내는 예를 올리게 하고 지키면서
    받드는 관원 두 사람을 두어 모든 절차를 각 원(園)의 예에 따르게 하니,

 

    대저 우러러 아득하게 넓음은 하늘이요,
    단을 쌓아 제사를 지냄에는 제기와 제수가 제 자리를 차지하여 그 경건한 정성이 한결같을 것이로다.

 

    선조의 시신이 묻힌 곳이 이곳이니 만약 산 전체를 묘역으로 봉한다면 어디에다 사모하는 정을 부치리요?
    지금부터 자자손손 억만년 영구히 전례(典禮)가 되리로다.
    아, 짐(朕)이 어찌 이런 전례를 만들었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열성조께서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완산(完山)은 전주부(全州府)의 남산이요, 우리 왕실의 관향이다.
    그래서 전부터 묘석이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조경단 지석]

천보 13년은 신라 경덕왕 13년 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