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목조대왕(穆祖大王) 이야기 / "덕릉(德陵)" 함남 신흥군 가평면 능리

정다운1004 2016. 1. 5. 01:07

목조대왕 (穆祖大王) 이야기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요,

고려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 (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 (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 (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 (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 (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완산실록> <동국세기>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부분적으로 자구(字句)가 틀릴 정도이다.

 

 `목조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신데,

하루는 꿈에 청의동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공의 선대에 하느님께서 주신 물건이 있으니 잘 간직하시오. 후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꿈을 깨어 찾아보니 구슬도 아니고 돌도 아닌 술잔 같은 것이 있었다.

이에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어느 날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에는 天狼山,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시는데

한 노파가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대왕께 물었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보물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 그 노파가 말하기를

 “향린산(香麟山 : <충효전>에는 香因山)에 천 년 묵은 청학(靑鶴)이 선동(仙童)으로 변하여 용궁의 보물을 훔쳐다가 준 것이요.” 하며,

보여 달라 하기에 보여 주니 그 노파가 보고서

 “이것은 용궁 깊숙히 간직해 두었던 활과 화살인데 그 선동이 어떻게 훔쳐 갔는지 알 수가 없군.” 했다.

 

이에 대왕이 묻기를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그 노파가 대답하기를

 “속세의 인간들이 내가 용녀(龍女)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거룩한 천명이 장차 공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백호도(白虎刀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白龍휢)를 전해 주려고 왔노라.”고 하면서 좋은 칼을 주므로,

대왕은 받고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찰라에 그 노파는 사라져 버렸다.'


 

탄생(誕生)과 일화(逸話)

 목조대왕은 전주에서 탄강하였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이르기를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은 발산(發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이라고 이른다.

   발리산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이 있었는데, 이 자만동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의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목조대왕은 <완산지(完山誌)>에 의하면 전주에 살던 유년 시절,

   수백 년 묵은 고목나무인 장군수(將軍樹)를 둘러싸고 여러 아이들과 진법(陣法)을 익혔다.

   전주향교 뒤에 있는 은행나무터가 바로 그것이다.

 

 목조대왕은 또 어렸을 때에 발리산 아래에서 폭풍을 만나 바위 밑으로 피하자 큰 호랑이가 나타났다.

   목조대왕은 거기에 모인 여러 아이들에게 이르기를

   “호랑이는 단 한 사람만 해칠 것이니, 모두가 자기 옷을 벗어 던져 봐서 옷을 받아 물은 아이만 희생될 수밖에 없다.”고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러면 네가 먼져 던져 봐라.” 하였다.

   목조대왕은 그 말대로 제일 먼저 옷을 벗어 던지니, 호랑이가 덥석 받아 물었다.

   이 때 여러 아이들은 목조대왕더러 나가라고 했다.

   그래서 굴에서 나오자 호랑이는 달아나고 동시에 바위 벼랑이 갑자기 무너졌다.

   그래서 여러 아이들은 화를 입게 되었으나 목조대왕만이 살아 남은 것이다.

 

   오늘날 전주 발리산 남쪽 강가에 우뚝 서 있는 정자 한벽당(寒碧堂 : 梧木臺 동쪽 1㎞)에서 400m쯤 떨어진 지점에

   굴러 내린 바윗돌이 강물 가운데서 완연히 보인다. 이 돌을 호운석(虎隕石)이라 한다.

 

 목조대왕은 춘추 25세쯤에 전주의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어수선한 한두 해를 넘기다가

   강원도 삼척으로 가기는 27세쯤이었다.
 그런데 삼척으로 간 그 1년 뒤가 고려 고종 18년이라는 문헌에 따라,

   목조대왕이 삼척으로 이주하기는 1230년(고려 고종 17)이요,

   목조대왕의 전주 탄강 연도는 줄잡아 1204년(고려 신종 7)쯤이다.


 목조대왕은 1204년(고려 신종 7) 전후에 전주에서 탄강하니,

   춘추 25세쯤의 1228년(고려 고종 15) 전후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는 전성기(全盛期) 약 100년간을 넘기자 바로 상극기(相剋期)와 변태기(變態期)로 접어든다.

 

 목조대왕이 전주에 살던 시대는 무신 정권이 한창이던 때요, 관민(官民)이 서로 반목하던 때이었다.

   이 때 전주의 호족 집안인 목조대왕은 전주 주관(州官)의 시기심으로 시비가 벌어지자

   고려의 무신 집권 시대 특유의 위화상(危禍相)은 마침내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 등이 한통속이 되어

   목조대왕과 대결하기 위하여 병력을 동원하려 했다.

 

   그러므로 장차 맹수와도 같은 몽고병이 쳐들어오면 목조대왕의 일족은 전주산성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실로 이것은 전주의 구래세력(舊來勢力)이 한 신흥세력(新興勢力)에게 밀려 나가야만 하는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전주 퇴거(全州 退去)의 원인

 이러한 어지러운 시대를 만나게 된 목조대왕은 예기치 않던 하나의 시련에 봉착하였다.

   당시 전주에는 안렴사(按廉使)와 산성별감(山城別監) · 주관(州官) 등 고급 관리가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전주에 산성별감이 새로 부임하게 되자, 주관은 바쳐야 할 관기(官妓)를 목조대왕께 청탁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당시는 사병(私兵)을 가진 무신들이 전횡하던 시대인지라,

   주관과 안렴사는 목조대왕에게 관의 명을 거절했다는 혐의를 씌워, 목조대왕 일족에 대항하여 군사를 보내기로 책동하였다.

   이것이 목조대왕 일족 전주 퇴거의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시조 사공공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滋滿洞 : 現 校洞)에서 살다가,

   17세손 장군공과 18세손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척 이주(三陟 移住)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리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려는 목조대왕은 장군공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 · 괴산(槐山) · 제천(堤川) · 정선(旌善) 등의 직선 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이 때 장군공과 목조대왕에 따르기를 원하는 혈족과 외족은 170여 호나 되었다.

대이동한 일족은 삼척군 내의 삼화사(三和寺 : 정선에서 동쪽으로 하나의 계곡을 지나면 있으며, 삼척군 내의 서북쪽에 위치하는데

동쪽 25리에 북평이 있고, 북쪽 30리에 묵호가, 서남쪽 10리에 頭陀山城이 있다) 근방에 도착한 것이다.
 
   대이동이 있자, 아니나 다를까 이듬해인

1231년 (고려 고종 18)에 제1차 몽고병의 침입이 있었고,

          같은 해에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장군공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1232년 (고려 고종 19)엔 제2차 몽고병 침입이 있었다.

           그러나 이 때 목조대왕은 삼화사에 열심히 참례(參禮)하였으며,

           또 일족의 일부는 묵호만(墨湖灣)으로 이동해 가서 선박 15척을 만들었다.

         진실로 성품이 호방하고 사방을 경영할 뜻이 있는 목조대왕은 과연 선견지명이 적중한 것이다.

           전주에서 목조대왕의 일족이 무리하게 그대로 남아 있었던들 일족의 화(禍)는 면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3년 후인

1235년 (고려 고종 22)에 제3차로 몽고병이 침입하였는데,

           이 때의 몽고병은 실로 전국 8도를 샅샅이 누비며 야만적인 행패를 다하였다.

         몽고병이 동해안에서 행패를 부릴 때 목조대왕은 일족을 이끌고

           삼화사의 서남쪽 골짜기 깊은 곳인 두타산(頭陀山)의 중턱인 두타산성으로 이동하여 피난하였다.

 

덕원 이주(德源 移住)

 그런데 목조대왕은 전주에서 삼척으로 이주한 지 수년만에

   다시 동북면의 원산(元山) 북쪽에 가까운 덕원(德源)으로 이주해야 했다.

 왜냐 하면, 1235년(고려 고종 22)의 제3차 몽고군 침입의 행패가 가라앉을 무렵인 그 이듬해에

   공교롭게도 전일의 전주 산성별감이 강원도의 안렴사로 부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강릉과 삼척 사이는 해륙 교통이 편리한 가까운 지리인지라,

   목조대왕은 장차 묵은 혐의로 말미암아 화가 미칠 것을 피하기 위하여, 일족을 이끌고

   이미 마련해 둔 선단 15척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손쉽게 동북면의 덕원부(德源府) 용주리(湧珠里 : 赤田社)로 이주하니,

   때는 1236년(고려 고종 23)이었다.

 

 이 때 전주에서 장군공과 목조대왕을 따라 삼척군으로 이동해 온 혈족과 외족 170여 호도 역시 목조대왕을 따라 이주해 왔는데,

   이 사실은 또 한편으로 일족의 선단이 묵호만(墨湖灣)에서 모두 영흥만(永興灣)으로 대이동해 왔음을 뜻하는 것이다.

 


삼척 왕래(三陟 往來)

 1239년(고려 고종 26)에 몽고군은 고려에서 철병(撤兵)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제4차의 몽고군 침입인 1254년(고려 고종 41)에 이르는 약 15년 간은 동해안에 평화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 동안에 목조대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자주 왕래한 것으로 살펴지는데,

   그것은 이색(李穡 : 1328∼1396)의 <환조구비문(桓祖舊碑文)>에서도 수긍 가는 것이 있다.
 
   목조대왕은 덕원에서 삼척을 왕래하며 활기리 노동(蘆洞)의 선고묘(先考墓)와 동산리의 선비묘를 성묘함 동시에

   과거에 이미 깊은 인연을 맺고 있던 삼화사에 참례하였는데,

   풍부한 학식의 목조대왕은 삼화사에 저 유명한 <금은수사경(金銀手寫經)>을 남겨 놓은 것이다.

 


고원 방어(高原 防禦)

         목조대왕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하여 온 지 10여 년 후인

1248년 (고려 고종 35)∼1253(고려 고종 40) 사이에,

           고려는 목조대왕을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삼아서

           원나라가 점령하고 있는 쌍성(雙城 : 永興 · 和州) 바로 남쪽인 고원(高原)을 지키게 하였다.
 
           이 당시 영흥 북쪽의 함경도는 원나라의 속령으로서

           원나라의 개원로(開院路 : 지금의 吉林省 · 遼寧省 · 咸鏡道 등) 정부에 속해 있었다.

 

 개원로의 산길대왕(散吉大王)은 쌍성(現 永興)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철령(鐵嶺 : 함경도와 강원도의 접경) 이북 지방을 취하려고 사람을 두 번이나 보내어

목조대왕에게 원나라에 항복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목조대왕의 한 수비군으로서 원나라의 대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마치 당랑거철(螳螂拒轍) 격인지라,

목조대왕은 마지 못하여 김보노(金甫奴) 등 1천여 호를 거느리고 항복하였다.

 

 그런데 이 1천여 호란 이보다 앞서 홍복원(洪福源 : 1206∼1258)의 평양 반란 때

평양 동쪽인 동양분지(東陽盆地)까지 밀려나온 평양사람들이다.

이들은 차츰 목조대왕의 위세와 명망을 듣고 동쪽으로 산맥 하나를 넘고 목조대왕의 행정 구역인 덕원으로 모여든 사람들이다.

 

 이 때 적장 산길대왕은 목조대왕에게 심회를 털어 놓고 가까이 오면서 옥배(玉杯)를 선사하였고,

목조대왕도 혈족의 딸을 산길대왕의 아내로 삼게 한 인연으로

목조대왕과 산길대왕과는 물망지맹(勿忘之盟)을 서약한 친근한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오동 이주(斡東 移住)

 그런데 목조대왕은 삼척에서 동북면의 덕원으로 이주해 온 지 19년만에 다시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였다.

오동(斡東) 발음을 <위적사(偉蹟史)>의 번역에선 `와뚱'이라 하고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선 `알동'이라 하고 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제2장에 `穆祖移居斡東之地'라 기록돼 있다.

위치는 두만강 입구에서 60리 거슬러 올라가면 있다. 이 곳에서 30리 더 올라가면 국방상의 요충지인 경흥(慶興)이 있다.

 

 


오동 이주 원인(斡東 移住 原因)

 박식하고 호탕하며 천하를 경영할 뜻이 큰 목조대왕이 원나라 점령하의 여진(女眞)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하게 된 사유는, 첫째 목조대왕이 개원로 정부의 산길대왕과의 관계가 극친한 때문이요, 둘째 원나라는 두만강 요충 지대의 행정관을 여진인이 아닌 이방인(異邦人 : 고려인)에게 맡기는 정책을 써 왔던 때문이요, 셋째 원래 두만강 하류변의 오 동 평야는 주인이 없는 광활한 경작 지대로서 선단을 가진 목조대왕 일족 영흥만 사람들이 봄이면 가서 논밭을 갈고, 가을이면 거둬 오곤 하여 이미 친근해져 있는 지방이었기 때문이다.

 

 

오동 행적(斡東 行蹟)

 1254년(고려 고종 41) 목조대왕은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하여 동북면의 덕원에서

이미 일족의 선단으로 개척돼 있는 항로를 따라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까지 항행(航行)하였다.

 

가는 도중에 시리(時利 : 利原)에 내려 여진족과 친목을 꾀한 다음,

드디어 개원로 정부의 남경(南京) 관할하 경흥(慶興) 땅인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 도착하니

때는 목조대왕의 춘추 51세 1254년(고려 고종 41)쯤이었다

.

 1255년(고려 고종 42) 목조대왕과 극친한 사이인 개원로 정부의 산길대왕은

목조대왕을 위하여 원나라 황제에게 아뢰어 오동천호소(斡東千戶所)란 구역을 새로 설치하였다.

목조대왕에게는 금패(金牌)를 내려주면서, 남경등처 오천호소(南京等處 五千戶所) 구역의 수천호(首千戶)로 삼고

아울러 다루카치(達魯花赤)란 관직을 겸하게 하였다.

 

 목조대왕이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에서 다루카치란 관직의 임무는

원나라 개원로 행정 구역인 남경 지역 내의 4성(城)을 관령(管領)하고 순찰하는 일이었다.

 

4성은

첫째 오동에 있는 오동대석성(斡東大石城),

둘째 오동 서쪽 남경에 있는 남경대토성(南京大土城),

셋째 오동 서쪽 120리에 있는 두문성(豆門城),

넷째 오동 서남쪽 120리에 있는 사오리대토성(沙吾里大土城)이었다.

 

 이 4성은 주로 군인이 거처하던 곳으로 목조대왕은 수시로 왕래 순찰하였으며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을 변동시키지 아니하였다.

 1258년(고려 고종 45) 목조대왕은 산길대왕의 영지(令旨)를 받아,

겸직으로 8개 백호(百戶 : 관청명, 萬戶 · 千戶 등)를 관령하는 명령을 받았다.

또 1260년(고려 원종 1)엔 목조대왕이 원나라 상서성(尙書省)으로부터 본소(本所 : 총본부)의 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동인(銅印)을 받았다.

  1264년(고려 원종 5)엔 원나라 황제로부터 오동천호(斡東千戶)를 담당하는 선명(宣命)을 받았다.

 

 태조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대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 1410년(태종 10) 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출처] 목조대왕- 오동 행적(斡東 行蹟) |작성자 지식스닷컴

 

 

 

[CNB저널 제325호] / 등록일 : 2013.05.06 11:52:51 [이상주 종묘스토리]

목조대왕(穆祖大王) 재치로 왕업을 닦다

 

 

목조대왕(穆祖大王) 위키백과 자료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李陽茂) 장군과 어머니 이씨(李氏)의 묘()

준경묘(濬慶墓) · 영경묘(永慶墓)


[요약]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목조(穆祖)의 아버지 이양무(李陽茂) 장군과 그 부인의 묘
[주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92, 98, 산 149, 하사전리 산 53


1981년 8월 5일 강원도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었고, 2012년 7월 12일 사적 제524호로 승격되었다. 준경묘는 목조의 아버지 양무(陽茂) 장군의 묘, 영경묘는 목조의 어머니 이씨의 묘이다. 1899년에 두 무덤을 수축하여 제각, 비각을 건축하였다.


묘소 일대는 울창한 송림이 원시림 상태로 우거져 있는데 특히 이곳 송림은 황장목이라 하며 경복궁 중수 때 자재로 사용하였다. 전주이씨 실묘로는 남한에서 최고 시조묘이며 해마다 4월 20일 전주이씨 문중 주관으로 제례를 지낸다.

강원도기념물로 지정된 뒤 1984년 8월에 삼척군(지금의 삼척시)에서 제각, 비각, 재실, 홍살문 등을 일제히 보수하였다. 묘에 관하여 목조가 한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棺)에 부모를 안장한 이후 5대에 이르러 조선(朝鮮)을 창업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개설


이양무는 고려시대 인물로 태조의 5대조이며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부친이다. 그의 부인인 삼척이씨는 상장군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목조가 전주를 떠나 강원도로 이주할 때 이들도 함께 동행하였다고 전한다. 강원도 삼척의 마을인 노동(蘆洞)과 동산(東山)에 있는 고총(古冢)이 그들의 무덤이라는 주장이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확실한 증거가 없어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무덤은 국가의 수호를 받았다. 그리고 대한제국기인 1899년에 이르러 황실에서는 이 고총을 목조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인정하고 노동의 이양무 무덤을 준경묘(濬慶墓), 동산의 부인 무덤을 영경묘(永慶墓)라 하여 국가 사전(祀典)에 포함시켰다.


백우금관(百牛金棺)의 전설(傳說)


  태조 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穆祖)께서 부친(이양무) 상(喪)을 당하여 묘지를 구하려고 사방으로 헤매다가 지금의 준경묘(濬慶墓)가 위치한 노동(盧洞)에 이르러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한 도승(道僧)이 지나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혼자 말로 “참 좋구나, 대지(大地)로다” 하는 것이었다.


  목조께서 나무 밑에 앉아 있었으므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도승은 이처럼 탄성을 올리면서 계속해서 “그렇지만 개토제(開土祭)에 소 일백 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棺)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葬事)를 지내야 하겠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제압하고 창업주가 될 명당이로다!” 하는 말을 남기고 수 백보를 가더니 갑자기 사라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목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이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목조께서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렇다!” 손바닥을 친 이안사는 소 일백마리는 흰 소 한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百)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인과 의논을 하였다. 부인에게는 다른 말을 일체 하지 않고, “내일 밭갈이를 할 터이니 처가의 흰 소를 잠시 빌려 오시오” 라고만 하였다.


  다음날 친정에 가서 흰 소를 몰고 부인이 오자 이 소를 잡아서 제물(祭物)로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는 부친의 귀중한 영가(靈駕)를 넣은 관에 씌울 금은 귀리 짚으로 대신하였는데,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여 1231년 부친의 장례를 치른 묘가 지금의 준경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영경묘(永慶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