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義安大君) 파(派) 종중(宗中) 약사(略史) 연혁(沿革)
● 1348년(충목왕4) 의안대군은 환조(桓祖)의 3자로 함경도 화녕부 흑석리에서 정안옹주 김씨를 어머니로 하여 탄생하셨다.
휘는 화요 시호는 양소다.
● 1360년(공민왕9) 환조(桓祖)가 승하하자 태조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공민왕은 의안대군
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함께하며 귀한 음식물을 내려 대군의 어머니에게
드리도록 하고,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도 공민왕의 이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간의 우애
를 돈독히 하였다.
● 1371년(공민왕20) 대군 연치24세 때 대장군으로서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쳐 큰공을 세웠고 우왕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왜적
을 소탕하였다.
● 1373년(공민왕22) 완천군 숙 탄생
● 1375년(우왕1) 학천군 징 탄생
● 1379년(우왕5) 영천군 담 탄생
● 1381년(우왕7) 흥천군 회 탄생
● 1388년(우왕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선봉에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를 도와 활약하였다.
● 1392년 태종과 함께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 1392년(태조1) 순충좌명개국1등공신 녹권(국보232호)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 1393년(태조二) 2월9일에 임금이 새로운 도읍지(서울)의 山水와 형세를 관찰하시고 公에게 성곽을 축조할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 1393년(태조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 1395년(태조4) 정도전은 <삼봉집(三峯集)>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 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 1398년(태조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 공신녹권을 사급 받았다.
● 1400년(정종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 1401년(태종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2등 공신녹권을 사급 받았다. 그 해에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차남 완천군
도 좌명3등 공신녹권을 함께 받았다.
● 1402년(태종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 1402년(태종2) 10월13일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
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
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소?”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
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 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 1404년(태종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
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 1405년(태종5) 차남 완천군 淑이 의정부 찬성사에 올랐다.
● 1406년(태종6) 차남 완천군 淑이 별세했으며 시호는 `제의(齊懿)'이다.
● 1407년(태종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 1408년(태종8) 10월6일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가 돌아가셨다.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콩 각각 백 석(石)과
종이 2백 권(卷)을 부의(賻儀)하였다. 시호(諡號)를 양소공(襄昭公)이라 주었다. 화(和)는 순박하고 씩씩하고 용감하여 젊어서부터
태조(太祖)를 잠저(潛邸)에 모시어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았으며, 매양 정토(征討)에 따라다녀 여러 번 전공(戰功)을 나타내서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또 정사(定社)·좌명(佐命)의 열(列)에 참여하였다. 돌아가시니 나이 61세였다. 일곱 아들이
있으니 이지숭(李之崇)·이숙(李淑)·이징(李澄)·이담(李湛)·이교(李皎)·이회(李淮)·이점(李漸)이다.
● 1410년(태종10) 7월 의안대군이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배향되었다.
● 1419년(세종1) 장자 순천군(順川君) 지숭(之崇)이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위선음즐서 600권을 가지
고 돌아와 임금을 뵈옵고 조정에 바친 후 며칠 후 갑자기 별세했다. 시호를 `정소(靖昭)'라 했다. 판 지돈녕부사와 판좌군도 총제사
를 역임했다.
● 1435년(세종17) 세종대왕은 공신의 적자를 충의위(忠義衛)에 입속시켜 후손이 이어지도록 했는데, 순천군은 적통이 없어 이를 조정
에서 논하도록 하였다. 사헌부에서 올리는 상소로써 결정되었는데, 의안대군의 차남 완천군(完川君) 숙(淑)의 자손으로 잇게 하였
는데 순천군보다 먼저 돌아가니 사속(嗣續)은 완천군의 장남 하령군(河寧君) 양(穰)으로 이어졌다. 하령군은 우찬성을 지냈고 단종
대왕 때 좌찬성으로 봉직하였으다. 이 때
● 1453년(단종1) 단종대왕을 옹위하다 단종사화로 김종서 등 3상신(三相臣)과 함께 순절했다. 이에 연좌되어 일가 16인이 화를 당했
다. 16인은 하령군을 비롯하여 하령군의 두 아들 여양군 승윤, 여평군(礪平君) 승효(承孝)와 여양군의 세아들 계조(繼祖) ·소조(紹
祖) · 장군(將軍)과 여양군의 4촌 순창군 승로(承老)와 하령군의 4촌 안계군 보인(保仁)과 안계군의 6남 곧 화성군 해(諧) · 화산군
심(諶) · 화릉군 모(謨) · 화남군 사문(沙門) · 화평군 주령(注令) · 화선군 원상(原祥)과, 또 하령군의 4촌 한산군 의산(義山)과
그의 아들 해령군 우경(友敬)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사화에서 살아남은 형제, 자손들은 피신하여 흩어져 살았다. 이때 성묘 끊기고
대군의 묘소는 실전되었으며 전대 제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재산과 위토를 몰수당하였다.
● 1457년(세조3) 9월에 세조대왕은 단종사화로 화를 입은 240여 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비단 여덟 폭에 이름을 친히 써서 공주
동학사 숙모전으로 보내어 초혼제를 지냈다.
● 1520년(중종15) 중종대왕은 왕실의 계보에 다시 입속 시키도록 하였으며, <선원보략>을 수찬할 때 “양세원훈 일문과절(兩世元勳
一門 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 1731년(영조7) 좌찬성 하령군은 영조대왕에 의해 장릉 충신단에 6종영(六宗英)을 차례로 배식할 때 모셔졌다. 6종영은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 금성대군, 화의군, 한남군, 영풍군과 의안대군 손자 하령군을 말한다.
● 1738년(영조14) 각파 종원들에게 <무오보>를 발간하게 했는데, 이것이 최초로 편찬한 의안대군파 세보이다.
● 1775년(영조51) 황해도 배천 여의삼리에 의안대군 사우를 중건하고 제사를 올리니 영조대왕은 좌승지 이재간(李在簡)을 보내어 친
필로 치제문을 내리고 치제토록 하였다.
● 1786년(정조10) 각 지파 종원들이 협찬하여 <병오보>를 속간하고 사우, 위토, 전답을 매입하여 시제일을 매년 10월 15일로 정하고
의안대군과 완천군 부자를 모셨다.
● 1791년(정조15) 정조선황제는 단을 세워 단종대왕의 묘정에 배향하게 했다. 정단에 모셔진 32인 중 하령군 찬성공의 위차(位次)가
다섯째이고, 공의 아들과 사촌 등이 모두 단종대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같은 해 의안대군 13대 종손 종회(宗恢)를 특명으로 입시
케 하여 대군 묘소가 실전된 것을 애석해 하며“널리 찾아서 주달하라.” 하고, 전조(銓曹)에 명하여 “대군의 재실을 세우라.” 하였다.
● 1799년(정조23)에는 사우치제문을 내려 동부승지 최헌 중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였다.
● 1812년(순조12) 순조숙황제가 치제문을 내리어 연안도호부사 권준을 보내어 치제토록 하고 대군의 묘소가 실전된 것을 안타까워하
며 찾도록 하였다. 대군의 후손들이 옛날 가보와 족보에는 대군의 묘소가 양주 천마산 마치고개에 있다 하였고, <태묘배향교문연기
(太廟配享敎文年紀)>에 따르면 1408년(태종8)에 장례를 지냈고 1399년(정종 1) 왕의 교지에는 위토가 3백결 50부라 하였다. 이를
토대로 하여 대군의 후손들은 긴 세월을 찾아 헤맸으나 찾지 못했다.
● 1823년(순조23) 9월 서흥(瑞興)의 15대손 종려(鐘呂)가 양주의 산천을 헤매다가 천마산 아래에 이르러 노인들에게 수소문하니 내시
이세엽(李世燁)과 홍씨 등의 노인이 모두 “마치고개 백봉 아래에 한 고총이 있고, 잘린 비석과 뒹구는 석물이 있는데 예로부터 의안
대군의 묘소라고 전해진다.” 하였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궁평에 신도비와 제청이 있다 하나 깨어진 기왓장만이 뒹굴 뿐 언제 없어
졌는지 알 수 없었다. 또 무덤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으나 끊긴 비석과 상석 형태가 마멸되어 한 글자도 상고할 수 없었다. 광주의
풍려(豊呂), 부여의 창문(昌文)이 함께 널리 분묘를 파서 금정(金井)의 경계까지 내려가도 끝내 지석을 발견하지 못했다. 한편 배천
의 종손 응려(應呂)가 그 해 10월 양근에 이르렀다가 포천 김생(金生)의 말에 따라 천마산 아래에 이르러 동네 사람들에게 물으니
의안대군의 묘소라 하는 데 김생의 말과 똑 같았다. 일전에 세 사람이 와서 지석을 찾다가 그냥 돌아갔다고도 하였다. 응려는 지석
을 찾겠다고 결심하고 일꾼을 모아 광중(壙中)을 파내다가 13척의 깊이에 내려가니 내외의 관이 썩었으나 형체는 남아 있고 관 위에
`의안대군(義安大君)' 넉자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황금으로 써서 칠을 했기 때문에 썩지 않아 어제 쓴 것처럼 뚜렷했다. 14대손 종희
(宗禧)가 종손 응려와 상의하여 임금께 알렸더니 형조와 예조에서 계청하여 조정으로부터 예를 베풀고 봉축하였다.
● 1824년(순조24) 5월에 순조숙황제는 동부승지 이항을 보내어 치제문을 내리고 제사케 했다.
● 1825년(순조25) 조정에서는 국왕의 명에 따라 물역과 석물 제청 등을 계획해 내리고 경기감영에게 명하여 사방의 산 경계와 수호군
을 왕실의 대군과 공신의 예우에 따라 정해 주었다. 혹 사산(四山) 안에서 범장하거나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라도 도벌하는 일이 있
으면 관가로부터 법전에 따라 시행하고, 수직하는 사람 7명을 정해 주어 만일 도망하거나 사고가 있으면 수시로 대체해서 영세토록
수호하는 것이 의당한 일이라 하였다.
● 1826년(순조26) 대군의 묘소를 찾은 제종친들은 파종중에 연락하여 수단(收單)을 모으는 데 힘써 종사를 원활하게 운영하고 <병술
보>를 발간하였다.
● 1830년 배천에 사는 종손 원기(垣箕)와 응려 부자가 같은 해에 별세하니 그 아들 종손 주헌(周憲)이 7세의 어린 나이라 이때의 종사
는 포천의 경상(慶相), 광주의 풍려(豊呂), 서흥의 종려(鐘呂), 부여의 지용(止容), 삭녕의 종희(宗禧) 등이 관리했다. 묘소의 석물
및 신도비는 종손 부자가 돌아간 후 경상 · 풍려 · 흥려가 건립했다.
● 1846년(헌종12)에 <병오보>를 수찬하였다.
● 1850년(철종1)에 이르러 최승현(崔承顯)이 “사산국(四山局) 내 백호 위는 임자 없는 무덤이라.”하여 다섯 무덤을 한 지경으로 삼아
나무를 베어내어 강제로 경계를 침범하였다. 16대손 주헌(周憲)이 경기감영과 양주읍에 제소하여 4년을 소송하였다. 그후 종손과
그의 동생 주담(周聃) 및 산지기를 옥에 가두어 여러 차례 진정해도 뚜렷한 조처가 없으니 전후의 판결을 받들어 이행할 길이 없자
종손과 여러 일가들이 사사로이 파 옮기고 문장(門長)인 의수가 자진하여 옥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관은 법으로 처결하지 않고 역졸
들을 풀어 종손과 그의 아우 여러 일가 및 승려 등 6명을 3년 동안이나 가두었다.
● 1864년(고종1)에 종손의 아우 주담이 억울한 사실을 낱낱이 갖추어 임금께 주달하였더니 18년 동안 싸운 억울한 일이 하루아침에
풀렸다. 그 후 황해도 배천 여의삼리에 거주하던 종손 주헌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대군묘하로 이사하여 수호군과 함께 묘소를
관리하며 종사를 맡게 되었다.
● 1864년(고종1) <선원속보 갑자보> 13권을 편찬하였다.
● 1869년(고종6) 고종태황제는 종정경(宗正卿) 리봉의(李鳳儀)를 보내어 치제문을 내리고 제사하였다.
● 1872년(고종9)에는 임신특명으로 의안대군의 3대까지의 자손에게 봉군 겸 영,종정경(領宗正卿)의 봉작을 내렸다.
● 1900년(광무4)에 <선원속보 경자보> 17권을 편찬하였다.
● 1924년 화수회(花樹會)를 조직하고 족보 편찬을 의결하여 <갑자보>를 발간하였다.
● 1950년 6·25전쟁으로 순조숙황제가 내린 사우가 소실되었다.
● 1957년 3월 서울 청량사에서 화수회 총회를 열어 초대회장에 해익(海翼)이 선임, 소실된 의안대군 사우 중건, 대군 묘소 영역 산림
보호 및 조림사업, 화수회 임원 보강 및 종재 보호관리 위원회 구성 등의 사항을 의결했다.
● 1958년 1월 종재관리위원회 위원 16인의 결의로 종중 재산 소유권을 의안대군파 종중 명의로 보존등기 완료했다. 이해 <무술보>를
발간하고 편찬대금 잉여금과 재경 제종원의 협찬금으로 대군 사우를 중건하였으며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 1971년 3월 화수회 총회를 개최하고 회장에 2대 영환(英煥)을 선임하였다.
● 1972년 5월 화수회 총회를 개최하고, 3대 회장에 규린(圭璘)을 선임하고 4군파 대표를 선임, 종중 명칭을 화수회에서 의안대군파 종
중이라 개정하였다.
● 1974년 9월 종중 총회에서 4대 회장에 영환을 선임하였다.
● 1975년 5월에는 종중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의안대군파종중 명칭을 의안대군파종중중앙회로 개칭, 회장에 5대 규복(圭復)을 선임함
● 1977년 5월 종중중앙회 정기총회에서 6대 회장에 보열(輔烈)을 선임했다.
● 1984년 2월 종중중앙회 정기총회에서 7대 회장에 춘휘(春徽)를 선임하고 <병인보(丙寅譜)>를 발간했다.
● 1988년 6월 종중중앙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8대 회장에 춘휘(春徽)가 재임되었다.
● 1991년 6월 종중중앙회 정기총회에서 9대 회장에 규찬(圭璨)을 선임하고 의안대군의 묘소를 개사초 하였다.
● 1993년 10월 종중중앙회 정기총회에서 10대 회장에 규찬(圭璨)이 재임 되었다.
● 1995년 6월 종중중앙회 총회에서, 11대 회장에 계휘(啓徽)를 선임하고, 의안대군파 종중중앙회를 의안대군파 종중이라 개정하였다.
● 1998년 6월 종중총회에서 12대 회장에 숙찬(淑燦)을 선임하였다.
● 2001년 6월 종중총회에서 13대 회장에 숙찬(淑燦)이 재임되었다.
● 2003년 2월 종중총회에서 14대 회장에 규범(圭範)을 선임하였다.
● 2005년 2월 종중총회에서 15대 회장에 군휘(群徽)을 선임하였다.
● 2007년 10월 종중총회에서 무길(茂吉) 일명 보상(輔日)을 선임하였으나 2008년 1월 무효화되어 규범(圭範)이 사법부에서 직무대행
으로 선임되다.
● 2008년 2월 종중총회에서 16대 회장에 보일(輔日)을 선임하였으나 4월 직무정지 되고 건휘(健徽)가 직무대행으로 선임 되었다.
● 2009년 12월 임시총회에서 문규(文圭)가 회장에 선임되었으나 2010년8월16일 직무정지 되어 장해창변호사가 직무대행이 되고 8명
의 직무대행이사 체재로 운영되었다.
● 2010년 12월15일 회장선임이 무효가 됨으로 규약이라 하여 석휘(石徽)가 회장을 맡았으나 사법부에서 인정하지 않고 2011년1월18
일 사법부에서 임시회장으로 호운(浩云)을 지명하였고 임시이사 20명이 선임되었다.
● 2012년 3월 종중총회에서 종토 평내동 산98-7외 5필지를 1,250억원에 하자는 매입자 HSP그룹에서 책임지는 것으로 매각 결의하다.
● 2012년 6월25일 임시총회에서 차기 정기총회까지만을 임기로한 임시회장인 호운(浩云)을 17대 회장으로 선임하였다.2012년 6월 종
중임시총회에서 17대 회장에 호운(浩云)을 선임하였다.
● 2013년 3월 종중총회에서 18대 회장에 찬용(讚鏞)을 선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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