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의안대군(義安大君)의 7형제 아들들

정다운1004 2016. 1. 14. 14:49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환조대왕의 서자인 이원계와 이화의 가계


태조 4권,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18일(경신) 3번째기사

환왕(桓王)에게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으니, 이원계(李元桂)는 비(婢) 내은장(內隱藏)이 낳았고, 이화(李和)는 비(婢) 고음가(古音加)가 낳았다. 원계(元桂)의 아들이 네 사람이니, 이양우(李良祐)·이천우(李天祐)·이조(李朝)·이백온(李伯溫)이고, 화(和)의 아들이 일곱 사람이니, 이지숭(李之崇)·이숙(李淑)·이징(李澄)·이담(李湛)·이교(李皎)·이회(李淮)·이점(李漸)이다. 양우(良祐)의 아들은 이흥발(李興發)·이흥제(李興濟)·이흥로(李興露)·이흥미(李興美)요, 이천우(李天祐)의 아들은 이굉헌(李宏軒)이다. 지숭(之崇)의 아들은 이수장(李壽長)이요, 숙(淑)의 아들은 이오망(李吾望)·이지발(李之發)이요, 징(澄)의 아들은 이의경(李義敬)·이미동(李微童)이요, 담(湛)의 아들은 이효손(李孝孫)이요, 회(淮)의 아들은 이복동(李福同)이요, 점(漸)의 아들은 이실견(李實堅)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


 

의안대군(義安大君)의 7형제 아들들

 

장남 순천군(順川君) [  ?~1419(세종 1)]

대군의 장남이며, 휘는 지숭(之崇)이고 시호는 정소(靖昭)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성군(完城君)으로 봉해졌다가 1878년(고종 15)에 순천군(順川君)으로 재봉군 되었다.

1409년(태종 9) 5월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1년(태종 11) 5월 장생전(長生殿)을 수리하고 평양에 있는 태조고황제의 진영(眞影)을 봉영해 와 광연루 에 봉안하고 태조고황제의 진영과 개국공신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1413년(태종 13) 4월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어 판경승부사(判敬承府事)를 제수받았다.

1414년(태종 14) 1월 지돈녕부사, 1415년(태종 15) 12월 판좌군도총제사, 1416년(태종 16) 판돈녕 부사, 1418년(태종 18) 6월에 판우군도총제사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2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였다.

6월에 하성절사로 다녀와 임금을 배알하고 중국 황제가 하사한 선물을 전달한 후 며칠 뒤 갑자기 세상을 뜨니 조정에서는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여 3일간 조회를 중단하고 장례를 후히 치러 주었다. 묘소는 실전되었다.

 

차남 완천군(完川君) [1373(고려 공민왕 22)~1406(태종 6)]

대군의 차남이며 휘는 숙(淑), 시호는 제의(齊懿)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완천군은 부친 의안대군과 함께 태조고황제를 도와 개국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 에 숙종대왕은 이런 부자의 높은 공을 기려 '양세원훈(兩世元勳)'이라 친필을 내렸다.

1398년(태조 7)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로 임명되고, 1401년 (태조 1) 좌명1등공신 녹권을 받고 완천군으로 책봉되었다.

1405년(태종 5)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406년(태종 5)10월에 별세했으며, 이 때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제문을 내려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광주군 노우개 일안인데 장남 하령군양(穰)이 계유정난에 3상신(相臣)과 함께 순절하여 실전되었다.

 

3남 학천군(鶴川君) [1375(고려 우왕 1)~1435(세종 17)]

 

대군의 3남이며 휘는 징(澄),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학천군(鶴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대군자손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하고 무골 기질이 있었으며 13세에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낭장(郎將)을 지냈다.

1396년(태조 5) 1월 문과에 급제했다. 정헌대부이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2년(태종 12) 5월 우군총제에 임명되었으며 1414년(태종 14) 9월 하절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태종 17) 7월 동지돈녕부사에 발탁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좌군도총에 임명되었다.

1419년(세종 1) 7월 표전(表箋)을 받들고 북경을 다녀오라는 어명을 받아 북경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10월에 돌아왔다.

1423년(세종5) 5월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25년(세종 7) 중군도총제로 발탁되었다.

1426년 (세종 8) 절일사(節日使)로 3월에 북경에 다녀와서 6월에는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자격으로 다시 북경에 다녀왔다.

1429년(세종 11) 판좌군부사, 1432년(세종 14) 3월 판중추원사, 1434년(세종 16) 9월 지돈녕부사로 임명되었다.

1435년(세종 17) 8월에 별세하니 세종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산원은 고려시대의 중앙군인 2군·6위(二軍六衛)의 정8품 무관직으로 고려의 중앙군은 응양군,

용호군 등 국왕의 친위부대인 2군과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등 전투부대인

6위로 구성되었는데, 산원은 국왕의 친위부대인 응양군에 3명을 배치한 것 외에는 각 영마다 5명씩 두어 전체 223명을 설치했는데, 이로 보아 200명 단위부대에 속했으며 그 지휘관인 낭장(郎將)과 부지휘관인 별장(別將)의 보좌관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산원방(散員房)이라는 회의기구가 있었으며 특히 2군 소속의 산원은 근장산원(近仗散員)이라 불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정2품 상(上)의 문 ·무관에게 주던 관계의 칭호로, 1865년(고종 2)부터는

종친(宗親)의 숭헌대부(崇憲大夫), 의빈(儀賓)의 봉헌대부(奉憲大夫)도 동반관계(東班官階)를

사용함에 따라 이 이름으로 고쳤다.

 

-동지돈녕부사 조선 시대 돈녕부에 속한 종2품의 관직. 1414년(태종 14) 돈녕부가 설치되면서 1인의

정원을 두었다. 돈녕부 이외 아문(衙門)의 동지사(同知事)는 모두 타관이 겸하였으나 동지돈녕부사만은 왕의 친족이나 외척중에서 품계가 해당하는 자를 임명하였다.


 

-지돈녕부사 조선 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한 예우 관청인 돈녕부 소속의 지사. 정2품이다. 부지돈녕부사(副知敦寧府事)는 지돈녕부사의 아래 벼슬이다. 

-병마절제사 진관체제에서 거진(巨鎭)의 지휘관이었는데, 처음에는 경상좌도의 경주진(慶州鎭)과 전라도의 전주진(全州鎭)에 있다가 그 후 경기도 광주(廣州)와 평안도 의주(義州)에도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각 지방의 수령이 자신이 담당하는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는 무관직을 겸임하였는데, 경주와 전주에는 수령 가운데 가장 품계가 높은 부윤(府尹:종2품)이 있었으므로 다른 지방과는 달리 병마절제사라고 높여 불렀다. 병마절제사의 칭호는 1466년(세조 12)의 관제개혁 때에 확정되었다. 평양부와 함흥부는 부윤을 관찰사가 겸하였으므로 병마절제사를 두지 않았고, 조선 중기에는 1577년(선조 10)과 1593년에 광주(廣州)와 의주(義州)가 각각 부(府)로 승격함에 따라 그 부윤이 병마절제사를 겸하였다 .

 

- 판중추원사
1 고려 시대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종이품 벼슬로 뒤에 판추밀원사, 판밀직사사로 고쳤다. ≒판원사·판중추.
2 조선 전기에 둔, 중추원의 으뜸 벼슬. 원래 정이품 벼슬로 세조 12년에 판중추부사로 고치고 종일품으로 올렸다. 

 

-계유정난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세종·문종 때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김종서·황보인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으로, 이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유정난이라 한다.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부사(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南智)·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苯)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세종비 심씨의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들인 대군(大君) 7명도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안평대군의 집에는 많은 문신이 출입하고 있었고,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등을 모사로 하여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1453년 봄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는데, 이 동안에 김종서나 안평대군 등이 그를 제거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은 이들이 단종에 반역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정변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계획되기 시작하여 수양대군이 명에서 귀국한 뒤 뛰어난 무인 또는 문신을 본격적으로 규합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그결과 1453년 10월 즈음에는 수양대군 휘하에 홍달손(洪達孫)·홍윤성(洪允成)·양정(楊汀) 등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은 이들 심복 무사들을 거느리고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나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고 보고하고는 곧 왕명을 빌어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여서 사전에 계획한 대로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의정부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문신·무신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새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설치하고 이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군사권까지 독점했다. 또한 권람·홍달손·한명회 등 정변을 이끄는 주요인물과 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 등 자기 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등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고 이들을 요직에 앉힘으로써 권력기반을 다져갔다. 이같이 정변에 이어 취한 여러 조치를 바탕으로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변은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던 정인지·최항·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之)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관직자들까지 김종서·황보인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정변이 난 뒤 수양대군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들은 수양대군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단종을 보위하려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고, 결국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1456년(세조 2) 박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제거당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종서의 심복 무장으로서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절제사로 강력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징옥을 정변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파직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징옥의 반란이 나기도 하였다

 

4남 영천군(寧川君) [1379(고려 우왕 5)~1431(세종 13)]

 

대군의 4남이며 휘는 담(湛)이고 영천군(寧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했고 1417년 (태종 17) 우군총제, 1418년(태종 18) 동지 돈녕부사에 제수 되었다.

총녕대군의 세자 책봉 때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라는 특명을 받아 임금께 올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군을 수창궁으로 불러 행차시나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반드시 수행토록 하였으므로

늘 가까이서 임금을 모셨다.

1419년(세종 1) 지돈녕부사로 좌금위삼번 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로, 4월에는 중군도총제로 승진했다.

10월에는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받아 북경을 다녀와서 이듬해 9월에 도총제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평양위선사 지돈녕이 되어 선온(宣醞: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는 것) 받들고 떠났다.

1430년(세종 12) 세종대왕은 6월에 4도감을 설치하여 빈전도감(賓殿都監)의 제조로 임명했다.

1413년(세종 13) 12월에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애석해 하며 예조에 명하여 치제케 하고 제문을 내렸다.

또한 부의로 쌀.콩 각 20석을 내렸다.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신일사 앞산에 있었다.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1987년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봉하에 천묘하여 신도비와 사우를 세워 봉제사하고 있다.

이장 작업 중 광중(壙中)에서 조선통보 8엽이 출토되어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추가자료

 

이 름 : 영천군(寧川君) 의안대군派 자료종류 : 4 세약사 생몰 : 1379∼1431 조회수 :  대군의 4남이며 휘는 담(湛)이고 영천군(寧川君)으로 봉군되었다. 문과에 급제했고 1417년(태종 17) 우군총제, 1418년(태종 18) 동지돈녕부사에 제수되었다.  충녕대군의 세자 책봉 때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하라는 특명을 받아 임금께 올리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군을 수창궁으로 불러 행차시나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반드시 수행토록 하였으므로 늘 가까이서 임금을 모셨다. 1419년(세종 1) 지돈녕부사로 좌금위삼번절제사(左禁衛三番節制使)로, 4월에는 중군도총제로 승진했다. 10월에는 하정사(賀正使)의 임무를 받아 북경을 다녀와서 이듬해 9월에 도총제가 되었다.  1423년(세종 5) 평양선위사 지돈녕이 되어 선온(宣춠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하는 것)을 받들고 떠났다. 1430년(세종 12) 세종대왕은 6월에 4도감을 설치하여 빈전도감(賓殿都監)의 제조로 임명했다.  1431년(세종 13) 12월에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애석해 하며 예조에 명하여 치제케 하고 제문을 내렸다. 또한 부의로 쌀 · 콩 각 20석을 내렸다.  묘지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신일사 앞산에 있었다. 개국1등공신인 의안대군의 아들이므로 나라에서 공의 묘소를 하사했는데, 이 묘소 경내를 한 유생이 범장(犯葬)한 일이 있었다. 이를 처리하는 산송진정(山訟陳情)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시대의 충효사상과 위선사업을 알기 위하여 간략하게 기록하여 둔다.  “영천군 묘앞에다 범장한 산송에 대한 진정서. 부여 거주 유학(幼學) 리대려(李大呂 : 大容) 등은 유수(留守) 합하에게 말씀드립니다. 저희들 14대조 지돈녕부사공은 개국공신 의안대군의 아들로서 분묘가 광주군 돌마면에 있사온데 산직(山直)을 두어 금호(禁護)하여 내려온 지 근 4백년이 되었습니다. 자손들이 매년 세일사에 성묘의 예를 병행하고 있사온데 뜻하지 않게 지난 신축년(1841 : 헌종 7)에 한 무덤이 소생의 선묘 앞에 생겨나 탐문한 즉 이는 서울에 사는 남지구 처의 무덤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대대로 지나온 내력으로 충고하고 사리로써 깨우치니 남지구가 사과하며 이장할 뜻으로 사정하더니 다시 옮기어 지돈녕공의 분묘 계하에다 이장하였습니다. 이 어찌 사대부의 도리라 하겠습니까? 지난 병오년(1846 : 헌종 12)에 두 차례나 진정하여 즉시 옮기라 하였습니다만 지금까지 이장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각기 먼 시골에 흩어져 천리길에 있사오나 가슴 속에 가득 찬 일념은 오직 위선(爲先)에 있사옵니다. 금년 3월 15일 주상께서 행차하실 때 만번 죽음을 무릅쓰고 원통함을 알리었습니다. 마침 천지 부모 같은 큰 은혜를 특별히 입사와 봉심(奉審) 거행하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첩보를 내리시어 속히 이장하도록 하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병오년에 두 번 진정했을 때 즉시 이장한다 하였는데 지금까지 6년이 지나도록 파내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고만 있으니 믿지 못하겠습니다. 감영과 고을에 올렸던 도형을 연명소장에 동봉하여 유수 합하께 올리옵니다. 원방의 백성으로 하여금 원통한 울부짖음에 지체없이 선처하여 주시옵기 비나이다. 신해년(1851 : 철종 2) 4월, 유학 리대여 등 23명 올림”  지금은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1987년 충남 부여군 초촌면 추양리 당산봉하에 천묘하여 신도비와 사우를 세워 봉제사하고 있다. 이장 작업 중 광중(壙中)에서 조선통보 8엽이 출토되어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5남 전천군(全川君) [ ? ~ ? ]

 

휘는 교(挍), 대군의 5남으로 판교령과 세자시사관(世子侍射官)을 역임했으며 전천군(全川君)으로 봉군되었다.

 

6남 흥천군(興川君) [1381(고려 우왕 7)~?]

 

휘는 회(洄), 대군의 6남으로 흥천군(興川君)으로 봉군되었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이 되었다.

1421년(세종 3) 도총제로 임명되었다. 1453년 계유정난 때 흥천군의 장남 보인(保仁)과

5손자(해.심.모.사문.주령)가 모두 화를 입었으며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7남 익천군(益川君) [?~1433(세종 15)]

 

휘는 점(漸), 대군의 7남으로 익천군(益川君)으로 봉군되었다. 1399년(정종 1) 4월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정종대왕은 크게 기뻐하며 경연시독관 배중륜에게 "숙부의 아들 점이 종친으로서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범상한 예가 아니다. 네가 집현전 상서사(尙瑞司)와 삼관의 여러 선비와 함께 의안공의 집에 가서 치하하라."고 일렀다.

1414년(태종 14) 세자시사관과 첨지돈녕부사, 1421년(세종 3) 공조참의, 1425년(세종 7)우군동지총제,

1425년(세종 8) 부유후(副留侯), 1430년(세종 12) 좌군총제, 1431년(세종 13) 동지돈녕부사,

1432년(세종 14) 11월에 전주부윤에 임명되었다.

1433년(세종 15) 12월 18일 별세하자 세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부의했다.

한편 장남 의산(義山)은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