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유래(由來) 본관(本館) 연혁(沿革)

정다운1004 2016. 1. 4. 12:49

 

 

전주 이씨 (全州 李氏) / 위키백과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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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올려진 글들과 중복되는 내용이 있으나

의안대군 완천군파 회장이신 이준상님께서 쓰신 글을

의안대군 종중에서 감수 편집하신 글이기에 추가로 여기에 옮겨둔


全州李氏 李成桂의 뿌리를 찾는다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성계(李成桂)의 조상(祖上)이 어디서 왔느냐는 견해(見解)가 여럿으로 나누어 지는바 여진족설(女眞族設)=Mongol軍閥出身, 예맥족설(濊貊族設), 화교출신(華僑出身說)=(中國由來) 等이 있다.

 

여기서 女眞族說은 全州李氏의 始祖라고 하는 李翰이 新羅時代에 登場하고 韓半島에 살던 李成桂의 祖上, 卽 李翰의 後孫이 元나라 時節, 또는 그 以前에 滿洲로 移動하여 元나라의 벼슬을 하는데서 나온 見解로 보이며, 예맥족설(濊貊族說)은 예맥족(濊貊族)이 중공족속(中共族屬)이냐, 한민족(韓民族)이냐? 견해(見解)도 분분(紛紛)한 상태(狀態)다.


따라서 결국(結局) 전주이씨(全州李氏)는 화교출신(華僑出身)이냐? 아니냐에 초점(焦點)이 맞추어 질 수 밖에 없다. 아래 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인 이한(李翰)에 對한 기록(記錄)으로 全州李氏의 유래(由來)를 밝히고 있는데 華僑出身을 고집(固執)하는 측(側)이나, 아니라고 하는 전주이씨측(全州李氏側)의 주장(主張) 모두 그 논란(論難)의 바탕인, 이한(李翰)에 대(對)한 기록(記錄)은 같다.


"아니땐 굴뚝에 연기(煙氣)가 나지 않는다.,는 俗談과 中國出身을 主張하는 자료(資料)가 全州李氏 始祖를 찬양일색(讚揚一色)으로 일관(一貫)하는점(點), 이성계(李成桂)의 성계조선개국(成桂朝鮮開國) 과정(過程)에서 보이는 모든 정황(情況) 等을 종합(綜合)해볼때 李成桂는 中國 出身이라고 본다. 더구나 成桂朝鮮 開國 過程에서 韓民族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만행(蠻行)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全州李氏 由來에 대한 여러가지 근거(根據)와 그 後孫들의 행적(行績). 全州李氏 족보(族譜)와 由來를 보면 始祖 李翰은 德望이 높고 文章이 탁월(卓越)하여 新羅 文聖王 司空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냈으며 그 後 代代로 벼슬을 해왔다.

18代 世孫되는 李安社는 代代로 全州에 살아온 호족(豪族)이었는데 새로 부임(赴任)한 知事의 탐허(貪虗)를 규탄(糾彈)하자, 軍士를 휘둘러 보복(報復) 하려하여 그를 피해 江原道 삼척현(三陟縣)으로 피신(避身) 했다가 다시 함경도(咸鏡道)를 거쳐 元나라의 간동(幹東)으로가 그 곳에서 다루하치(達魯花赤=地方官) 벼슬을 지냈고, 증손자(曾孫子)되는 李子春이 高麗時代에 功을 세워 사복경(司僕卿)에 이르렀다.


李子春의 아들, 卽 始祖의 22世孫 李成桂에 이르러 어지러운 國情을 바로잡고 배극렴(裵克廉) 等 52名의 추대(推戴)로 王位에 오르게 됨으로 朝鮮王朝를 창건(創建), 全州李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다.

〈完山實錄〉에는 우리 始祖에 對하여 이렇게 쓰여 있다. 야사실록(野史實錄)을 參考해보면, 始祖 司空公의 휘(諱)는 한(翰)이요. 字는 견성(甄誠)이시다. 公은 본래 中原=中國 에 살았는데 태어나실 때부터 거룩하여, 총명(聰明)이 과인(過人)하시고 재질(才質)이 특이(特異)하여 하나(一))를 들으면 열(十)을 알았다고 한다. 公의 나이 15歲에 한림원(翰林院)에 入學하시고, 계모(繼母) 朱氏가 매우 사납고 惡했으나 지극(至極)한 효성(孝誠)으로 모시었다. 그래서 그 때 동요(童謠)에 ''오얏나무 밑에서 반드시 왕기(王氣)가 나타나리라, 하더니, 마침 배가(裵哥)에게 모함(謀陷)을 받아 公이 바다를 건너 우리 나라로 오니, 그 때 나이 18세였다.

 

나이가 약관(弱冠)도 되지않아 文章이 非凡하고 道德이 卓越하여 仁慈한 기풍(氣風)을 크게 떨쳤다. 불과(不過) 數年에 사람들의 칭송(稱頌)하는 소리가 朝廷까지 들려 新羅의 文聖王이 불러 司空 벼슬에 任命하였고, 1年 남짓 다스리매 國情이 公平하여 모든 官員들이 교화(敎化)되고 만백성(萬百姓)들이 즐겼다.그래서 新羅 태종(太宗)의 十世孫 김은의(金殷義)가 사위를 삼았다. 곧 司空公은 본디 中國人으로 裵氏의 모함(謀陷)을 받아 新羅로와서 司空 벼슬에 올라 金氏를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出處 未詳의 〈李氏 得姓之 由來 〉란 글에서는 中國 歷史를 약술(略述)하고서 끝부분(部分)에 우리 全州李氏가 本來 中國 唐나라 皇室의 후예(後裔)라 하나, 그 派系와 原流를 밝힐 分明한 根據가 없고, 우리 始祖 휘 翰으로부터 代代로 完山人이 되었다라고 하였다.

 

慶州李氏로 부터의 分籍設은 慶州애 있는 新羅 六姓 : 李, 崔, 鄭, 孫, 裵, 사(篩)의 하나로 우리나라 李氏 中에서는 가장 歷史가 오래된 氏族이다.〈慶州李氏大同譜〉總論編을 보면 慶州李氏 由來가 나온다. 자못 傳說的이지만 新羅六姓에 始祖 6名은 모두 하늘로 부터 내려왔다.곧 六人天降說이다. 慶州李氏의 始祖 알평(謁平)은 하늘로부터 박바위(瓢岩)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이곳은 六村中 閼川 陽山村인데 나중에 及梁部(급량부)로 行政區域 名稱이 바뀌었다.

 

紀元前 69年(전한(前漢) 선제(宣帝) 지절(地節) 원(元) 3月 初一日에, 이 6村長이 謁川의 바위 위에 모여 陽山 아래를 바라보니, 以上한 氣運이 번개 빛 같고 白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양이 보여, 찾아가보니 검붉은 알이 있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슬피울며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六村長이 그 알을 깨보니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모두들 以上히 여겨 그 아이 이름을 赫居世라 불렀다. 이 赫居世가 13歲가 되자 紀元前 57年(前漢 宣帝 五鳳 元)에 이를 王으로 삼고, 나라 이름을 新羅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新羅를 建國한 功勞로 알평(謁平)은 아찬(阿餐)의 벼슬에 오르고 紀元前 32年(新羅 儒理王8) 李氏를 사성(賜姓)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李謁平이 慶州李氏의 始祖가 되는데, 過去에 〈慶州李氏族譜〉에는 李謁平의 먼 後孫 李居明 (蘇判公)을 中始祖 1世로 삼아 系代數를 따져 왔다.

그래서 李謁平부터 李居明까지는 몇 代가 흘러갔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近 200年 前 朝鮮末期 무렵에 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陜川李氏 族譜에 李謁平부터 李居明까지의 代數와 이름이 나타나 36代의 名單을 찾아냈다고 한다. 代數의 흐름을 보면 아래와 같다.


1세 謁平(알평)→2유→3타→4중가→5석→6문상→7방→8수장→9수→10기정→11미선→12성립→13서→14계환→15걸→16선장→17기담→18인흥→19확→20신정→21체→22태휘→23으영→24준→25소→26경지→27욱→28원장→29한로→30계탕→31도→32사언→33기→34희두(禧斗)→35계→36居明


위에서 보면 始祖 李謁平부터 36世孫 李居明까지의 系統이 分明하다. 過去에는 李居明을 中始祖 1世로 따져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 全州李氏와의 問題는 바로 34世 희두(禧斗)의 同生 진두(辰斗)와 그의 둘째 孫子 翰이 關係되는 것이다. 여기서 34世 辰斗氏의 略歷에 나와있는 記錄을 보면 ''公도 文章家로서 景文王때 壬午年에 兄 侍中公과 같이 科擧에 及第하여 벼슬이 사랑평 장사내사상 병부령에까지 이르렀다.

 

〈世藏譜(세장보)〉를 參考 하건데 이분의 孫子 翰이 完山李氏의 始祖가 되었다더라, 이 記錄에 依하여 李辰斗의 둘째 孫子 翰이 바로 우리 全州李氏의 始祖 司空公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陜川李氏의〈尙書公波世譜〉에는 34世 辰斗(진두)→35世 白全→36世 恭→37世 翰으로 世系를 꾸며놓고 李翰의 略歷에 ''대사공 은상서 어사중승상 상주국으로서 자금어대를 下賜 받았다. 配位는 軍尹 金殷義의 딸이다. 全州李氏의 始祖다''라고 적어 놓았다. 여기서도 翰이 全州李氏의 始祖라고 分明히 밝히고 있으나, 慶州李氏 族譜와 다른点은 恭과 翰을 兄弟가 아닌 父子 사이로 바꾸어 놓은 것이 以上한 점이다.

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姓으로 慶州李氏 族譜에 남아 있는 것은 원주이씨(原州李氏).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등이 있다. 이 姓들은 分籍된 記錄이 分明하다. 그러나 우리 全州李氏가 慶州李氏에게서 갈라져 나갔다는 記錄은 위에서와 같이 매우 曖昧(애매)하고, 그 記錄이 翰氏의 略歷에 記錄되어 있지 않고 그 祖父의 略歷에 記載되어 있는 点이 더욱 以上히다.

 

以上으로 볼때, 우리 全州李氏가 中國에서 왔다. 또는 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왔다 하지만 모든 記錄이 아마도 옛날 事大思想에서 緣由한 野史的 記錄이라 세직(世稷:世直)의 世字가 唐나라 太宗 李世民과 같은 行列字로 본 것이다.

또 慶州李氏에게서 왔다는 記錄은 慶州李氏의 歷史가 가장 오래니까 혹시 갈라져 온 것으로 볼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慶州李氏는 現在 李謁平 始祖로부터 오늘날 75世 熙자 行列까지 2千餘年의 歷史를 가졌고, 慶州李氏의 中始祖 李居明과 全州李氏의 李翰은 同行列이므로 이분이 우리의 始祖라면 年代는 비슷하리라 본다.

 

오늘날 韓國의 李氏는 本官이 237本이나 된다. 이 中에서 歷史가 第一 오랜 姓은 慶州李氏이고 中國에서 歸化한 代表的인 李氏는 延安李氏이며, 越南에서 歸化한 花山李氏도 있다.그러면 우리 全州李氏는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러나 記錄이 分明치 않으나 우리의 始祖 司空 李翰 할아버님의 祖上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問題는 現在로서는 斷言할 根據가 없기 때문에 正確하게 糾明할 수있는 後日을 期約해 볼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全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大興李氏, 寧海李氏 等도 있음을 添言한다.

 

 

全州李氏 族譜.始祖:李翰의 本官 及 由來에 對하여

 

全州는 全羅北道 中央에 位置한 地名으로 ,古代 馬韓의 遠山城에서 由來하며, 百濟時代에 完山 또는 비사벌, 비자화 等으로 불리우다가 555年 完山州로 하였다. 그 후 景德王이 完을 의역(意譯)하여 全州로 고쳤고, 王建이 後百濟를 滅亡시키고 한때 安南都護府라 하다가 恭愍王이 完山府로 하였다. 朝鮮 太祖때는 先祖의 故鄕이라 하여 完山 유수부로 改稱하였다가 여러 변천(變遷)을 거쳐 1949年 全州市로 改編되었다.


全州李氏의 始祖 李翰은 新羅때 司空을 지냈고, 太宗武烈王의 10世孫 軍尹 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우리나라 最大의 벌족(閥族)인 大姓의 淵源을 이루었다. 그후 始祖의 아들 自然이 侍中을 歷任했고 孫子 天祥은 僕射를 지냈으며, 曾孫 光禧는 阿干을, 玄孫 入全은 司徒를 歷任하는 等 新羅에서 벼슬을 지내다가 15 世孫 勇夫에 이르러 高麗朝에서 홍무위 大將軍을 歷任하였다.


그後 그의 아들 璘이 內侍執奏로 侍中 文克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17世에 陽茂 左右位 中郞將을 歷任)를 낳았으며, 上將軍 이강제의 딸에게 장가들었던 陽茂는 18世에 安社를 낳으니 이분이 바로 李太祖의 高祖父인 穆祖였다.


豪放한 性品으로 信望을 받았던 穆祖는 처음에 全州에 살다가 山城別監과 사이가 나빠 江陵道 三陟縣으로 移居하였으나 工巧롭게도 江陵도 안렴사(按廉使)로 任命된 者가 바로 그 山城別監 이어서 穆祖는다시 家族을 데리고 三陟을 떠나 咸吉道 德源에 定着하였다가 元나라에 歸化하여 알동(斡東)땅으로 移住, 原住民 5千戶를 다스리는 다루하치(達魯花赤)가 되니 이때가 高麗 高宗朝였고, 〈龍飛御天歌〉에 東北 方面 사람들이 모두 穆祖에게 쏠려 쫓으니 李氏朝鮮 王業의 始初가 여기서부터 始作되었다고 한다. 穆祖로부터 千戶 벼슬을 世襲한 翼祖(李行里)는 元나라 世祖를 도와 倭人征伐에 參戰했고 元나라에 歸化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本國에 있었다.


翼祖가 婦人 崔妃와 더불어 洛山 觀音寺에서 祈禱하여 낳았다는 탁조(度祖)의 長子 完唱大君 子興은 兵曹判書에 贈職되었고 次子 桓祖 子春은 元나라 總管府가 있던 雙城에 千戶를 지냈으며, 셋째인 阮元大君 자선(子宣)은 完山伯에 俸해졌다.


1315年에 出生했던 桓祖 子春은 恭愍王의 北疆政策에 內應하여 雙城을 함락(陷落)시켜 咸州 以北의 땅을 回復하는데 決定的인 功을 세워 大中大夫 司僕卿이 돠어 저택(邸宅)을 下賜받았으며, 判軍器監事로 西江 兵馬使를 兼하여 왜구(倭寇) 侵入을 討伐하고 삭방도(朔方道) 萬戶 兼 兵馬使에 任命되어 咸鏡道 地方을 다스렸다.


膝下에 3男1女를 두었던 桓祖의 長男 元桂가 紅巾賊이 侵入했을 때 功을 세워 2等功臣에 책봉(冊錄)되었고 桓祖의셋째 아들 和는 두차례 王子의 亂을 平定하여 太宗때 領議政에 올라 大君에 進封되었다. 1392年(太祖 1)7月16日 松京 수창궁에서 卽位한 太祖로부터 마지막 임금인 純宗까지 27名의 王이 519年間 持續한 朝鮮王朝의 基礎를 세웠던 太祖 李成桂는 桓祖 子春의 둘째 아들이며, 始祖 李翰의 22世孫이다.

 

韓國 最大의 벌족(閥族)으로 發展해온 全州李氏는 大小 120餘波로 갈라져서 世系를 이어왔다. 99波로 알려져 있으나 후사(後嗣)가 없는 大君이 29名 程度가 되므로 實題로는 그 數가 줄어든다.(大君 :25波, 君:74波) 全州李氏의 人脈으로는 世宗의 아들 밀성군 침(琛)의 系統에서 6名의 政丞과 3名의 大提學을 輩出하여 注目울 끌었고 定宗의 아들 덕천군 후생(厚生)의 系統에서는 領議政 1名과 大提學 3名을 輩出시켰고, 政丞 3名을 輩出시킨 廣平大君 : 世宗의 아들 여(璵), 政丞 2名의 宣城君波 : 定宗의 아들 茂生), 政丞 1名과 文武官을 輩出해 낸 孝寧大君波; 太宗의 둘째아들 보)와 함께 華麗한 命脈을 이루었다.

 

各 系統別로 家門을 빛낸 代表的인 人脈울 살펴보면, 鎭安大君 方雨가 高麗末 隅王을 廢하고 恭愍王을 세웠을 때 密職務事로 明나라에 그 政變을 說明하러 갔었으며, 朝鮮朝에 들어와 王子의 亂이 일어나자 海州에 隱居하였다. 무안대군(撫安大君) 芳蕃의 後는 世宗의 아들 여(與)가 世宗의 命을 받아 養子로 들어가 後代를 이었는데, 그의 아들 부(溥)가 李施愛의 亂에 功을세워 宗室의 賢者로 불리웠다. 定宗의 人脈으로는 신성군 茂生, 진남군 종생終生, 덕천군 후생厚生, 무림군 선생(善生)의 後孫들이 有名하다.

 

선성군 茂生의 曾孫 학정(鶴丁)의 아들 양원(陽元)은 광국 3等功臣으로 한산府院君에 俸해지고 右議政에 올랐다.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留都大將으로 敵軍을 크게 大破한 後 領議政에 올랐던 양원은 義州에 避亂 中이던 先祖 임금이 요동으로 건너가 내부(內附) 했다는 와전(訛傳)된 消息을 듣고''國事를 가히 어찌 할 道里가 없다하며 나라의 아픔을 自身의 아픔으로 삼겠다면서 絶穀 8日만에 피(血)를 토(吐)하고 순절(殉節)하였다.

 

군수(軍帥) 克仁의 아들 홍주(弘胄)는 40年間 벼슬을 지내고 領議政에 까지 이르렀으나 그의 집은 두어칸 草幕뿐이었고 한뙈기 公園에는 대(竹)와 花草가 조촐하게 피어있었다고 하며 글씨에도 一家를 이루어 文廟의 重修碑文을 남겼다.

 

진남군 終生의 後孫에는 수창부정 稱의 아들 憲國이 鄭汝立의 謀反事件을 다스리는데 功을 세워 平南3等功臣에 오르고 先祖때 右議政을 거쳐 左議政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呼聲3等 功臣으로 完城府院君에 封해졌다.

 

덕천군 厚生의 아들 孝伯은 李復, 李衡과 더불어 當代에 활(弓)잘 쏘는『七射宗』으로 불리웠으며,『원교집(圓嶠集)』에 依하면, 그의 무덤이 廣州 도논리에 있는데 그 터는효백이 평소(平素)에 활을 쏘고 사냥하던 곳이다.

 

太宗의 長子인 讓寧大君 䅠는 王世子로 封해졌으나 世宗의 賢明함을 爲해서 猖狂自恣 하여 世子를 아우에게 물려주고 여생(餘生)을 방랑(放浪)하였었다.

次子인 孝寧大君 보(補)는 佛敎를 깊이 믿었다. 直彦 : 孝寧大君의 5代孫은 右贊成에 이르러 淸白吏에 綠腺 되었으며, 吏曹判書 양의 孫子 명(溟)은 仁祖때 丙子胡亂 後 枯渴된 財政을 맡아 國庫의 充實을 基하는 한편 物價를 安定시켜 韓國 財政史上 뛰어난 업적(業績)을 남겼다.

 

활(弓)을 잘 쏘아 長距離 射手로 이름을 떨쳤던 誠寧大君 종(緟)의 後孫에서는〈지봉유설(芝鳳類設)〈찬록군서(纂錄群書)〉等 數十種의 명저(名著)를 저술(著述)하여 名望을 떨쳤던 수광과 억울한 사람을 너무 않이 求해주어서 地獄에서도 繼續 領議政을 지내고 있으리라는 聖求=수광의 아들의 父子 有名하다.特히 聖求는 仁祖때 妓生 制度를 廢하여 모두 故鄕에 돌려 보냈던 일로 이름을 떨쳤고, 양화강(楊花江) 위에 집을 짓고 살 때에 집에 불이 났었는데, 그는 밭뚝에 나와 있다가 다른것에 대해서는 一切 묻지도 않고''술독은 탈이 없느냐. 술을 따라 이웃 사람들에게 사죄(謝罪)하라고 했다는 逸話가 전한다.


익녕군 (치)의 後孫에서는 貞恩의 曾孫 元翼이 〈梧里政丞〉이란 이름으로 많은 逸話를 남겼다. 世宗의 아들 18兄弟 中 가장 命脈을 이룬 밀성군 침(琛)의 5代孫 수록(綏錄)은 光海君때 원익의 從事官으로 活躍하였고, 폐모론이 일어나자 陽根에 물러가 살았으며, 그의 아들 敬與가 가난한 一生을 살면서 器局으로 領議政에 올랐다.


그 外 全州 李氏를 빛낸 人物로는 완원군 수의 曾孫 夢設이 李夢鶴의 亂을 平定하고 保寧에 隱居하여 鄕風을 세웠고, 그의 아들 城과 원은 學名을 떨쳤다. 진의 아들 상질(尙質)은 學文이 賢達하여〈삼유신(三儒臣)〉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으며, 그의 아들 휜은 언간(言諫)으로 절의(絶義)를 세워. 大提學으로 淸白吏에 록선(綠腺)된 孫子 조(肇)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純祖때 右議政을 지내고 名文章가로 詩名이 높았던 書九는 박재가, 이덕무(李德懋), 유득공(柳得恭) 等과 함께 〈漢詩의 四大家〉로 손꼽혔으며,承旨 得一의 아들 상황(相璜)은 純祖때 領議政을 지내고 領中樞府事에 이르러 ,憲宗때 右議政으로 (純祖實錄)을 편찬(編纂)했던 지연(止淵), 철종때 左議政을지내고 궤장을 下賜받았던 憲球 興宣大院君 하응(昰應), 鐵宗때 영의정(領議政) 재원(裁元), 大韓民國 初代 大統領을 지낸 承晩 等과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다. 1985年 經濟企劃院 人口調査 結果에 依하면 全州李氏는 南韓에 總 558,019家口, 2.379.53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李氏 集姓村                         단어해설(單語解說)

咸北 길주군 동해면 석성동            의역(意譯) : 전체의 뜻을 살리는 번역=直譯

咸南 북청군 평산면 용전리            변천(變遷) : 세월에 흐름에 따라 바뀌어 변함=변이(變移)

平北 정주군 신안면 연봉리            사공(司空) : 신라,고려때 벼슬 명칭의 하나(정일품).조선=공조판서

平北 정주군 고덕면 관해리            벌족(閥族) :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그런 집안

京畿道 연천군 중면 도연리            연원(淵源) : 사물의 근본=본원(本源)

忠南 부여군 초천면 추양리            호방(豪放) : 기개가 장하여 작은일에 거리낌이 없다.=호종(豪縱)

全南 나주군 금천면 완곡리            세습(世襲) ; 한집안의 재산, 신분, 직업 따위를 대대로 물려받는 일.

慶北 문경군 가은읍 왕릉리            내응(內應) : 내부에서 내밀히 적과 통함.=내부(內附)

                                                슬하(膝下) : 무릎의 아래라는 뜻. 부모의곁

                                                후사(後嗣) : 대를 잇는 자식.=후승(後承)

                                                기국(器局) : 사람의 도량과 재간=기량(器量)

                                                내부(內附) : 은밀하게 내부에서 적에게 들러붙음=내응(內應)


작  성  자 : 완천군 회장 이준상

편집&등록 : 의안대군파 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