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의안대군(義安大君) 시조(始祖)부터 25세(世)까지 / 선원선계 (璿源先系)

정다운1004 2016. 1. 4. 14:12

 

 

전주이씨 (全州李氏) 의안대군(義安大君派) 파계도(系圖)

 

여기 소개된 것은 의안대군파(義安大君派) 중심으로 "1세,시조(始祖)로 부터 의안대군(22세)"에 이르는 파계도이다

 

태조(이성계)께서 등극하시어 위로 고조까지 주존하여 대왕으로 높임으로써(18세.목조대왕/19세.익조대왕/20세.도조대왕/21세.환조대왕)

 1. 시조(始祖)로 부터 17세 장군공(將軍公) 양무(陽茂)까지는 선원선계 (璿源先系)라 하고,

 2. 18세 목조(穆祖)대왕부터 순종황제까지의 왕통계(王統系)는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고 한다.

 3. 그리고, 목조(穆祖) 5왕자로 부터 역대왕자(대군,군)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고 한다.

 

고로 이 페이지의 정확한 제목은

"전주이씨 (全州李氏)의 선원선계 (璿源先系)와 선원세계(璿源世系)" 일 것이다

 

아래의 보라색 기록은 "전주이씨 대동정약원"의 기록이다

 

 

1세() 시조(始祖) / 한()

 

우리 전주이씨의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우리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신데 신라 문성왕(新羅 文聖王,서기 839-856)때 사공(司空:신라시대 삼정승의 하나))벼슬을 지냈다. 원래 중국에서 살았는데 하늘이 내신 성인으로 천품이 총명하시고 재질이 뛰어나 하나를 들으시면 열이나 추리하셨다. 공께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가셨고 계모 되는 주씨가 어리석고 까다로웠으나 극진한  효도로 섬기셨다  그때에 오얏나무 꽃이 곱게핀 아래에 왕의 정기가 서려있다 라고 이런 동요가 떠돌았는데 마침 배가(裵哥)에게 지독한 모략으로 할 수 없이 공께서 바다를 건너 멀리 우리나라 신라(新羅)로 돌아오시니 그때의 춘추가 18세였다  20세도 못미쳐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시어 크게 어지심이 세상에 널리 떨치어 얼마 되지 않아 칭송하는 소문이 조정에 까지 이르게 되자 신라문성왕(新羅 文聖王)께서 신라사공(新羅司空)벼슬을 내려 행하게 되자 1년 남짓해서 나라 정치가 바로서니 백관 모두가 경복하고 백성 들이 좋아하는지라 신라의 정치가 날로 새로워져 가게 되자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따님에게 장가드니 비위께서는 평소에 어질고 착하시어 남들이 칭송하기를 반드시 훌륭한 자손을 두어 길이 창성 할 것이라 하였다      

 

 

2세() /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경주이씨족보>에는 자연(子延)으로 표 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 완산실록>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요사이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세의 군호로 후대에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 휘는 자연(自延)인데 신라경순왕(신라 마지막 왕)때에 시중(侍中:집사성의 장관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대신)벼슬에 오르셨고 비위는 진양군 윤자인(尹自仁)의 따님이시며 시중공은 슬하에 아들 천상(天祥)을 두시었다  그런데 기록에 문제점이 나타난바 시조 한께서 문성왕때 재위기간이 서기839년-856년 까지인데 아들 자연께서 벼슬에 오른 것은 경순왕때로 서기927년-935년까지 이므로 무려 백여년 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3세() / 천상(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고려 시대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리라.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 가 중앙관서에 들어가셔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서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 반드시 왕이 나오리 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 고 하였다.

 

자연공의 아들로 휘는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 원래 중국의 당(唐)송(宋)때 재상의 별칭으로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함)에 올랐다. 비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공께서는 일찍이 호탕한 성품으로 거리낌이 없으시더니 만년에 들어 철학연구에 취미를 갖이시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삼성문하(三省門下)에 자리잡고 천문과 지리학을 연구하셨다  9년만에 모든 이치를 통달하시고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麟趾山) 왕자봉(王字峯) 아래에 선산을 모신후에  말씀하시기를 우리 후손에 왕이될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인즉 중간에 무슨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절대로 천장해서는 아니된다고 하셨다

 

 

4세() / 광희(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씨족원류(氏族源流)>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했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환조대왕 정릉 신도비명(桓祖大王 定陵 神道碑銘)>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 완산실록>에는 별다른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이 `광희'공에 해당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세직공은 훌륭한 인물로 문장과 도덕이 뛰어난 당대의 은둔 군자인데 아들 8명을 두었다. 공은 이 아들들에게 형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며 참언과 재물을 멀리하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아들 8형제 중에 한 명만이 대를 잇고 나머지는 전염병에 모두 죽는 대목이 곁들어 져 있다.

 

천상공의 아들로 휘는 광희요 벼슬은 아간(阿干: 아척간(阿尺干)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관등의 6두품에 해당)을 지냈다. 비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5세() / 입전(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 씨족원류>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 司徒 ·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 완산실록>에는 입전공의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중 막내로서 위로 7형이 모두 전염병으로 일시에 사망하여 합동 장례를 치르고 유리걸식하니,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듣고 고결함에 탄복하여 고관의 직책까지 주었다는 내용이 곁들어져 있다.  또 <충효전>에도 이 이야기와 대동소이하나 입전공이 문옹(文翁) 으로 기록되고 8형제 중 장형으로 되어 있다.

 

광희공의 아들로 휘는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 :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司徒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다)를 지냈다. 비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6세() / 긍휴(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 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 육금불(六金佛)이 와서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긍휴공이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긍휴공은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하고 9년(또는 8년)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하고 훗날을 기약한다고 했다 하였다.

 

입전공의 아들로 휘는 긍휴요 비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비로소 고려조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는데 공의 나이 26세에 중국으로 건너 가셔서 문과에 오르시고 30세에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는데 7년만에 우리나라로 돌아 오셨다가 몇해 후에 또 중국으로 건너 가셔서 관사재(觀思齋)에 이르러 객관에서 돌아가시매 부인 이씨가 7세의 어린 아들(廉順)을 데리고 그 유골을 찾기 위하여 밤낮으로 울붓으며 조정에 호소하던 무렵 완탑촌 이란 마을에서 유숙하더니 그날밤 꿈가운데서 금부처가 나타나 지시하기를 공의 해골은 항주땅 탁산 아래 묻쳤노라고 하거늘 이렇듯 부처님의 지시와 가호를 입어 유해를 찾게 되었고 또 천자의 측명으로 고국 선영 아래에 반장해 모시게 되었다

 

 

7세() / 염순(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 완산실록>에는 염순공에 대한 일화가 없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6세(또는 28세) 때 문명(文名)을 날려 중국으로 들어가 송나라 휘종(徽宗) 때 문과에 급제하고 귀국하니, 고려조에서 기특하게 여겨 예천태수(醴泉太守)에 임명했다. 그 뒤 그는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 천자의 눈에 들어, 마침 쳐들어온 금(金)나라 군사를 물리치고 대도독부원수(大都督副元帥)로 임명되어 4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부인 오씨(吳氏)가 7세 된 아들 화선(和善 : 華先)을 업고 9개월을 걸어 중국에 들어가 완탑촌(玩榻村 : 完塔村)에서 묵을 때였다. 이 날 밤 꿈에 팔척대인(八尺大人 : 六丈鐵人)이 나타나 말하기를“당신 남편의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 <충효전>에는 蜀山으로 적혀 있음) 아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오씨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자살하려 하니 먼저 노인이 또 꿈에 나타나“죽지 말라. 훗날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여 깨닫고, 이튿날 문 밖을 나갔다.  그 때 한 여인이 슬피 울며 오는데, 거마(車馬)와 좌우에서 모시는 시녀들이 굉장하였다. 오씨가 나아가 물으니 답하되“나는 운남국(雲南國 : 漢南國) 우도독(禹都督)의 딸인데, 남편 곽필성(쥦必誠 : 郭必成)이 도원수의 종사관(從事官)이었는데, 항주 대전에서 전사하여 그 시체를 찾으러 가는 길입니다” 하였다. 오씨도 그간의 일을 말하니, 그 우씨가 수레에서 내려 오씨의 손을 잡고,“나라는 비록 다르지만 인심은 같으니 어찌 차마 모른 체하겠소?” 하고 함께 차에 태워 항주로 갔다.그러나 시체가 산더미같이 쌓여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울부짖으며 낮에는 찾아 다니고 밤에는 복파장군(伏派將軍) 사당에서 잤다. 몇 개월이 되어도 찾지 못했는데, 하루는 한 노인이 지팡이를 들고 와서 하는 말이, “나는 조선에서 온 부원수의 사령(使令)이었는데, 이 부원수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고, 나는 다리에 살을 맞아 살아났으나 이렇게 불구가 되었습니다.”라고 하고 부원수의 시체를 가리켜 주었다. 그래서 시체를 모셔 올 때 중국에서 모든 절차와 비용을 제공하여 3개월만에 귀국하여 선산에 장례지내니 조상꾼이 인산인해였다.' 그러나 이 일화는 <완산실록>에서는 6세 긍휴공 사적에 비슷한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세 책이 거의 허구적인 사실을 기록한 소설적인 사료임을 짐작케 한다.


긍휴공의 아들로 휘는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戶長 :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다)을 지냈다 비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8세() / 승삭(承朔)

 

7세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삭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보고 돌아오다가 청평산 (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객사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다 모시게 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없어졌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승삭이 화선(和善 : 和先)으로, 60세에 등과하여 65세에 벼슬이 평의사(平義使 : 平義士)에까지 이르렀는데, 갑자기 작고하여 국왕이 예관을 파견하여 호상하고, 평장사(平章使 : 平章事)로 증직하고 시호를 문학(文學) 이라 하고, 향린산 아래에다 서원을 짓고 모셨는데, 공근왕(恭勤王 : <충효전>에는 恭讓王) 때 소인배들이 참소하여 서원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 비위는 시랑(侍郞 : 고려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차관에 해당된다)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공이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덕망이 조야에 떨치었다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선산에 성묘하신후 산세를 두루 살피고 돌아 오시다가 청평산(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돌연히 객관에서 돌아 가시니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 종사케 하였다

 

 

9세() / 충경(充慶)

 

8세 승삭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경인데, <씨족원류>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 <목은집(牧隱集)>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충경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걸식의 지경이었는데, 지관(地官) 김지원(金志元)이라는 이가 와서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오.” 하므로,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 기를 “7∼8대에 이르러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마땅히 천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땅이 있소.”라고 했다. 그래서 그리로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이 날 밤 부인 윤씨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선조의 유골을 무슨 까닭으로 천장하려 하는가? 청령산 아래 5대에 삼공이 나올 땅은 곧 금가(琴哥)의 산소 자리이니, 금가 집에 리 씨가 들어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도리어 멸망할 땅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윤씨가 꿈의 조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김지원과 더불어 향린산 밑에 갔는데, 뇌성이 떨치더니 김지원은 벼락을 맞아 즉사하고, 충경공은 바 위 밑에 엎어졌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셨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똑같은 설화가 적혀 있는데, 다만 충경공의 이름을 희 흥(希興 : 喜興)으로, 김지원(金志元)을 김지원(金知元 : 金智原)으로, 배위 윤씨는 할머니 오 씨로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승삭공의 아들로 휘는 충경인데 벼슬은 생원이다. 비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따님이시다 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하는 지경이었는데 김지원(金志元)이라는 풍수(風水-地師이)가 와서 말하기를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가계가 곤궁하고 자손이 영체하는 모양인즉 선산을 한번 답사해 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이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 기를 이 산소를 여기에 모셔둔다면 7∼8대에 이르러서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하루빨리 천장해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땅이 있소 라고 했다 그래서 그곳으로 산소를 옮기려고 하는데 이 날 밤 부인 윤씨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선조의 유골을 무슨 까닭으로 천장하려 하는가 청령산 아래 5대에 삼공이 나올 땅은 곧 금가(琴哥)의 산소 자리이니 금가 집에 리씨가 들어가 어찌 편안할 수 있겠는가 이로 미루어 보면 도리어 멸망할 땅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그리하여 윤씨가 꿈의 조짐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렸으나 듣지 않고 김지원과 더불어 향린산 밑에 갔는데 뇌성이 떨치더니 김지원은 벼락을 맞아 즉사하고, 충경공은 바 위 틈에 은신했다가 겨우 살아 돌아오셨다

 

 

10세() / 경영(景英)

 

9세 충경공의 아들로 이름은 경영이다.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다.배위는 유수(留守)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유수'는 수도 이외의 인근 도시 또는 행궁(行宮)에 두던 특수한 지방장관이다. 고려 조선조에 걸쳐 두었는데 중앙 관서의 직속 기관이었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경영공이 7세에 부모가 함께 돌아가시니 증조모 정씨(鄭氏)가 등에 업고 구걸하면서 키 워 16세가 되어 유수 윤필인의 딸에게 장가가셨다. 윤씨 부인은 증조모 정씨를 섬길 때, 증 조모 정씨가 나이가 많고 치아마저 없자 윤씨는 자신의 젖을 짜서 지성으로 효도하여 천수 를 마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런 손부라고 칭찬했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이러하다. 경 영공의 이름이 `직(直)' 또는 `진(進)'으로 표기되고, 증조모가 오씨로, 강남의 큰 장사꾼 최 원(崔元 : 崔遠)에게 발탁되어 16세에 요명궁(寥明宮 : 瑤明宮) 거사(居士) 홍무(洪武 : <충 효전>에는 洪務日)의 사위가 되었다. 부인 홍씨의 효행이 특이하여 97세 된 증조모 오씨가 치아가 없음을 알고 자신의 젖으로 봉양하여 101세까지 사시게 하고 돌아가시자 3년상을 치 르는데 죽만 먹고 그 애통함이 예도를 넘었었다는 점이다.

 

충경공의 아들로 휘는 경영이다. 벼슬은 생원 호장이었으며 비위는 유수(留守 :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윤필인(尹必仁)의 딸이다  공이 7세때 부모가 돌아가시니 증조모 정씨(鄭氏)가 등에 업고 구걸하면서 키 워 16세가 되어 유수 윤필인의 딸에게 장가가셨다 윤씨 부인은 증조모 정씨를 섬길 때 증 조모 정씨가 나이가 많고 치아마저 없자 윤씨는 자신의 젖을 짜서 지성으로 효도하여 천수 를 마치게 하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효성스런 손부라고 칭찬했다

 

 

11세() / 충민(忠敏)

 

10세 경영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민이고 벼슬은 장사(長史)이었다. 배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장사'라는 벼슬은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 있다.
`충민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청의동자 (靑衣童子)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대개가 하늘과 사 람들을 원망하는데, 그대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허물하지 않으면서 천명을 기다리 니 어째서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시되, “궁하고 통달함이 모두 운명에 달려 있는 데, 어찌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망령되이 말하리오?”라고 하였다. 이에 청의동자가 기꺼이 사례하고 한 물건을 주면서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 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라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다. 그것을 숨겨 두고 청림산(靑林山) 아래에서 그릇을 굽는데, 불합격품이 나오지 않아 집 안 형편이 차차 나아져 말년에는 부자 소리를 들었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약간 다른 점은 이러 하다. 곧 `충민'공의 이름이 `후경(厚慶)'으로 나오고, 그는 9형제였는데 일시에 8형제가 전 염병으로 죽고, 막내인 그가 외톨이가 되어 강가에 가 낚시질을 하는데 천동(天童)이 내려와 이상한 물건을 주며 말했다는 것이다.

 

경영공의 아들로 휘는 충민이고 벼슬은 장사(長史: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이었다. 비위는 대장군 최오헌(崔五憲)의 딸이다. 공은 처음에 생활이 몹시 곤궁하여 의탁할 데가 없었는데 하루는 별안간 청의동자 (靑衣童子)가 나타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어리석어 천명을 알지 못하고 대개가 하늘과 사 람들을 원망하는데 그대는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허물하지 않으면서 천명을 기다리 니 어째서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대답하시되 궁하고 통달함이 모두 운명에 달려 있는 데 어찌 감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로 망령되이 말하리오 라고 하였다 이에 청의동자가 기꺼이 사례하고 한 물건을 주면서 천명이 돌아올 때 이것이 변하여 활과 화살이 되어 교룡(蛟龍)을 쏘게 될 것이오 하고 가거늘 이에 보니 토기 모양은 아니고 술잔 모양 같았다 그것을 숨겨 두고 청림산(靑林山) 아래에서 그릇을 굽는데 불합격품이 나오지 않아 집안 형편이 차차 나아져 말년에는 그리 곤궁하지 않으셨다

 

 

12세() / 화()

 

11세 충민공의 아들로 이름은 화인데 추밀(樞密) 벼슬을 지내셨다.배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추밀\'은 고려 때 왕명의 출납(出納) · 숙위(宿衛) · 군기(軍機) 등을 맡아 다스리는 관서 추밀원(樞密院)에 딸린 관원으로 추밀원사(樞密院使) ·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가리킨다. 종2품 · 정3품 벼슬이었다. 그리고 `대언\'은 왕명을 출납하는 벼슬로 승선(承宣)이라 고도 했는데, 나중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화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했으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술집과 기생집에만 다니며 자칭 협객(俠客)이라고 했는데, 부인 황씨가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강도를 만 났으나 끝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 청림태수(靑林太守)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하고 정 려문을 내렸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비슷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다만 화(華) 공을 덕량(德亮) 또는 덕랑(德郞)으로 적고, 부인 황씨를 김씨로 대신했으며, 그 부인이 효성스럽고 용감 하여 도적떼가 들어 재물을 강탈할 때 시어머니를 구하고 절개를 지켰다고 <완산실록>의 내용을 부연하고 있다.

 

충민공의 아들로 휘는 화인데 추밀(樞密 : 고려 때 동궁관(東宮官)의 관직으로 품계는 종7품이었으며 또 육위(六衛)에 속한 종6품의 장사도 있었다 조선조 때도 이런 관직이 있었는데 세손위종사(世孫衛從司)에 속해 있었다)벼슬을 지내셨다 비위는 대언(代言) 벼슬을 한 황진(黃璡)의 딸이다  화공은 처음에 집이 가난했으나 집안 일은 돌보지 아니하고 술집과 기생집에만다니며 자칭 협객(俠客)이라고 했는데 부인 황씨가 홀로 사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다가 강도를 만 났으나 끝까지 절개를 잘 지켰다 청림태수(靑林太守)가 이를 조정에 보고하여 포상하고 정문표창의 은전을 받았다

 

 

13세() / 진유(珍有)

 

12세 화공의 아들로 이름은 진유라 했는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일명 유진(有珍)이라고도 한다고 했다.
배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 완산실록>에는 이런 기사가 더 들어 있다.
`진유공은 처음에 집안이 가난하였으되 지극한 효도로써 어머니를 받들더니, 부인 오씨가 시집와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가난하되 편안해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채소를 뜯어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롭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효자 효 부라고 칭하였다.'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진유공의 이름을 천균(千鈞) 또는 천준(天俊)으로 표기하 고 어머니를 김씨로 표현한 외에는 대체로 <완산실록>과 같은 내용이다.

 

화공의 아들로 휘는 진유라 했는데 벼슬은 생원 호장을 지냈다 비위는 첨대중찬사(僉隊中贊事) 오대박(吳大朴)의 딸이다  공은 처음에 집안이 가난하였으되 지극한 효도로써 어머니를 받들더니 부인 오씨가 시집와 아내의 도리를 극진히 하여 가난하되 편안해하고 분수를 잘 지키며 채소를 뜯어다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도롭게 하니 세상 사람들이 항상 효자 효부라고 칭하였다

 

 

14세() / 궁진(宮進)

 

13세 진유공의 아들로 이름은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씨족원류>에는 호장을 지냈다고 하였다.
배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李?)의 딸이다.
< 완산실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들어 있다.
`궁진공이 15세에 아무개[失名]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 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 어양(魚羊 : 鮮)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 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 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그러나 <동국세기>와 <충효전>에서는 이 대목을 더 각색하여 미화시키고 있다. 곧, 궁진공의 이름은 여열(餘說)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여열이 15세 때 학문을 가르친 선 생이 김대유(金大有)로 실명화(實名化)되고, 김대유가 꿈을 꾼 뒤 여열을 사위로 삼으며, 여 열이 27세에 등과하여 홀유궁(笏츉宮 : <충효전>에는 屹留宮으로 표기했음)의 교수관(敎授官)이 되니, 모든 선비들이 구름같이 몰려 들었다.
그래서 배륭대군(裴隆大君 : <충효전>에 는 濱龍大君으로 표기됨)이 여열의 기상과 문장을 보고 임금님께 추천하여 대제학(大提學) 을 제수하려 했는데, 중상하는 자 있어 여열은 벼슬을 팽개치고 전원으로 돌아가 두문불출 하다가 작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은 두 아들을 두니 장남이 용부(勇夫)이고 차남이 단신(端信)이다. <씨족원류>에는 단 신을 단인(端仁) · 서인(瑞仁)으로 기록되었는데 글자가 비슷하여 이런 표기가 생겼을 것 이다. 이 단신공이 문하시중(門下侍中) 벼슬을 지냈고 시중공파(侍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시중'은 요사이의 국무총리에 해당한다.

 

진유공의 아들로 휘는 궁진인데 한림(翰林) 벼슬을 지냈다 비위는 장군을 지낸 이요의 딸이다  궁진공이 15세에 어떤분에게 나아가 배우는데 그 선생이 낮에 꿈을 꾸었다 꿈에 궁진공이 물고기를 잡아 양을 타고 올 때 달이 동산에서 뜨는데 용이 머리를 북쪽으로 들고 꼬리를 낮게 하고 서고 천병만마(千兵萬馬)가 북 치고 구호 부르며 행진하는 꿈을 꾸었다. 그 선생이 그 꿈을 풀이해 보니 조월(早月 : 朝字) 어양(魚羊 : 鮮字)에 신령스러운 물체가 도와 응하는 격이라 괴이히 여겨 감탄하다가 혼자 말하되 별것 아닌 것 같으나 후일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으리라 하고 스스로 물고기와 양 같은 물건을 준비해다가 두고 예로써 대접했다  공의 나이 2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호류궁(琥琉宮) 교수관(敎授官)에 임명되었는데 왕이 공의 모습을 보고 곧 한림원으로 옮겨 임명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남의 모함을 받아 귀양갔다가 거기서 작고했다

 


15세() / 용부(勇夫)

 

14세 궁진공의 장남으로 이름은 용부요,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씨족원류>에는 대장군 겸 태자청도솔부솔(太子淸道率府率)을 지냈다고 하였다.배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대장군\'은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 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태자청도솔부'는 태자좌청도솔부(太子左淸道率府)의 준말로 고려 때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이 부수(府率)일 것이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덧붙여져 있다.
`용부공은 3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신데, 남의 모함을 받아 세살배기가 잘못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 때 16세 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공은 겨우 말을 익히는 때였다. 마침 금(金)나라의 난리를 만나 중국 송나라 정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그 누님이 어린 동생을 대신하여 징발되어 낙랑(樂浪) 지방에 이르니 원수 이민항(李敏恒)이 군사를 점 검하였다. 그 누님 이씨가 허리에 화살통을 비껴 차고 손에 화살을 들고 나서니, 그 자색이 남다르고 위풍이 당당하여 이민항 원수가 보고서 “그대는 뉘 집 아들인고?” 하므로, 대답 하되 “나는 한림(翰林) 리궁진(李宮進)의 아들 용부(勇夫)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으로 데려갔다. 원수 악비(岳飛) 장군이 우리 나라 장수와 대좌하여 군사를 점검할 때, 누님 이씨가 앞으로 나가 섰다. 악비 장군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뉘 집 아가씨 인데 군대에 들어왔느냐? ”하므로 이씨는 시를 지어 악비 장군에게 말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이마에 점 찍히니 늙은 아버지 이름 빼낼 수 없어 / 군대에 채워지니 가는 허리의 몸이라고 어찌 애석해하리?
비단옷 벗고 차디 찬 철갑 옷을 갈아 입으니 / 국경지방에서 다행히 남자의 기풍을 펼 것이로세.
(點額難逃老父名    充軍何惜細腰躬  /  羅衣換着鐵衣冷    塞外幸伸男子風)

악비 장군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칭찬하고 이 시로 인해서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간신의 이간질로 악비 장군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머리를 깎고 영고탑(<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용부'가 `충일(忠逸 : 忠溢)'로, `이민항(李敏恒)이 이민행(李敏行)'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두 책에서는 일화가 더 구체적이다. 악비가 진회(秦檜)에게 모함을 당하여 죽을 때 리씨의 손을 잡고 뱃속의 아이가 남아일 것이니 잘 키우면 7대 후에 친정 본종(本宗)의 자손들과 손 잡아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리씨는 머리를 깎고 일부러 장애자로 만들어 구걸하며 방성지(方城池) 면수(沔水) 가에 사는 왜인(倭人) 집에 의지하여 살았다.

그러나 <충효전>은 더 구체적이다. 리씨가 악비를 사별하고 스스로 병자로 만들어 유리걸식하다가 방령지(方靈地)에 이르러 면수정장(綿水亭長) 갈가(乫家)에 의탁하니 이는 이적(夷狄)이었다. 그곳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의 7대손에 이르러 퉁두란( 李之蘭 : 靑海李氏 始祖)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이용부 대장군의 아들이 둘이 있으니 장남은 인(璘)이요, 차남은 거(?)로 이분이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를 이루어 시중공파에 이어 두번째 지파가 갈라져 나갔다. <선원계보>에는 `인'과 `거' 두 형제만 기록되어 있으나, <씨족원류>에는 용부 대장군은 3남 1녀를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도표로 그리면 아래와 같다.

 용부      ―子 준 의
(勇夫)     (俊義)
     ―子 의 방       ―― 女 사평왕후
        (義方)           (思平王后)
     ―子 인         ―― 子 양 무
     (璘)(일명: 隣)          (陽茂)
     ―女 우학유     ―-- 女 유 택
       (于學儒)           (柳澤)
寧古塔)까 지 떠돌아 가 아들을 낳고 살았다.


궁진공의 장남으로 휘는 용부요 대장군(大將軍: 고려 무관의 벼슬로 상장군(上將軍)다음 장군(將軍)의 위로 종3품이었다 태자청도솔부는 태자좌청도솔부(太子左淸道率府)의 준말로 고려 때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은 관청이다 그 관청의 장이 부수(府率)이다)을 지냈다 비위는 정승을 지낸 이형(李珩)의 딸이다  용부공은 3세 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만 계신데 남의 모함을 받아 세살배기가 잘못 군대에 편입되었다 그 때 16세 된 누님이 한 분 계셨고 공은 겨우 말을 익히는 때였다 마침 금(金)나라의 난리를 만나 중국 송나라 정부에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그 누님이 어 린 동생을 대신하여 징발되어 낙랑(樂浪) 지방에 이르니 원수 이민항(李敏恒)이 군사를 점검하였다 그 누님 이씨가 허리에 화살통을 비껴 차고 손에 화살을 들고 나서니 그 자색이 남 다르고 위풍이 당당하여 이민항 원수가 보고서 그대는 뉘 집 아들인고 하므로 대답 하되 나는 한림(翰林) 리궁진(李宮進)의 아들 용부(勇夫)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으로 데려갔다 원수 악비(岳飛) 장군이 우리 나라 장수와 대좌하여 군사를 점검할 때 누님 이씨가 앞으로 나가 섰다 악비 장군이 한참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말하기를 뉘 집 아가씨인데 군대에 들어왔느냐 하므로 이씨는 글 한수를 지어 악비 장군에게 말하니 내용은 이러하다

늙은처녀 동생 대리 피키 어려워 군역에 편입 되매 가는 허리가 여워라 비단옷 벗어놓고 구군복하니 나도 또한 전쟁터의 대장부로세

(點代難逃老娘耶)         (名充軍背惜纖腰)        (躬負羅袗着鐵衣)         (塞外幸宣男子風)

악비 장군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칭찬하고 이 시로 인해서 아내로 삼았다 그러나 간신의 이간질로 악비 장군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과 사별한 이씨는 머리를 깎고 영고탑(寧古塔)까지 떠돌아 가며 장군과의 사이에 나은 아들을 길렀다는 것이다

 

 

16세() / 인()

 

15세 용부공의 아들로 이름은 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배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 완산실록>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인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 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 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 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이 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 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 시오.
<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 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 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라고 하였다.
기대 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 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 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 요”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 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 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 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하라고 하였다.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만 인공의 이름을 정량(貞亮 : 定良)으로,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부국태(父國太) 또는 부국대부(富國大夫) 염우(?祐)로, 기대극(奇大極)이 기대승(奇大升)으로, 기린산(麒麟山)이 향린산(香麟山) 또는 향인산(香因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인(璘) 공의 휘를 인(隣)으로도 보느냐가 문제이다. 이 동음이자(同音異字)가 우리 선원선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선원계보>에는 용부(勇夫) 공의 아드님으로 인(璘)과 거(?) 형제만이 기록되어 있으나, 인(璘)을 인(隣)과 같이 볼 때는 준의(俊義)와 의방(義方) 두 형이 생기고, 매제[于學儒]가 더 늘어난다.
< 고려사> · <태조실록> · <씨족원류>에는 인(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璘)과 인(隣) 을 같은 분으로 보는 이유는
<선원계보>에 `인(璘)공은 벼슬이 내시집주(內侍執奏)요, 배위 는 문극겸(文克謙)의 딸이다'라고 되어 있고,
< 고려사> · <문극겸열전(文克謙列傳)>에 “문극겸은 미혼의 딸이 있었는데, 리의방(李義方 : ?∼1174)의 아우 리린(李隣)에게 시집보 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고려사> · <리의방열전(李義方列傳)>에 1174년(고려 명종 4) 1월에 중흥사(重興寺) 중 등 2천 명이 리의방을 죽이려다가 실패한 사건이 일어난 뒤, 리 준의(李俊義)와 리의방이 싸우므로 정중부(鄭仲夫 : ?∼1178)가 말하기를 “형제가 궁중에서 싸우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하며 리준의를 살해하려 하는 등의 기록으로 리준의와 리의 방이 한 형제임을 나타내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또, <고려사> · <우학유열전(于學儒列傳)>에는 “정중부의 난을 꾸밀 때 우학유 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하게 했는데, 그가 거절하자, 성공한 후에 그를 죽이려 하니, 그는 겁 이 나서 리의방의 누이에게 장가 가서 무사하였다.”고 하였다.
그래서 리준의 · 리의방 · 리린 · 우학유가 남매 지간이라는 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설을 따르는 기록은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을 비롯하여 타성의 학자들도 그렇 게 주장하는 분이 있다.
그런데 <선원계보>에는 인(璘)공의 아우에 거(?)공만 아우로 기록되어 있으니 어째서일 까? <고려사> · <최균전(崔均傳)>에 이런 기사가 있다. “1174년(고려 명종 4) 9월에 서 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 리의방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올 때 화주(和州 : 永興)의 낭장(郞將) 리거(李?)가 성문을 열어 주어 정중부군이 퇴각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리거란 분이 과연 우리의 선조인 평장사공일까? 동명이인일까? 시대가 비슷한 것은 수긍이 가는데, 형제간에 행동이 다르니 의아하게 느껴진다. 리준의가 마지막에 리의방을 죽이려 한 일화나, 리의방을 죽이려 쳐들어온 조위총의 편을 들어 리거가 리의방 에게 불리하게 행동했다면 그것은 형제간의 의리상 부도덕한 것이다.
물론 형제간에도 뜻이 다르고 이해가 달라 해치려던 일은 동서고금에도 있는 일이나 준의 · 의방 · 인 · 거를 4형제로 볼 때 관계가 매우 복잡해진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 있는 기록이 있으니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다 아는 대로 리의방은 정중부난 때 제2인자로, 총참모로 그의 지략에 의하여 그 일이 성공된 것이다. 혁명이 성공한 뒤 1174년(고려 명종 4) 3월 기축일에 그의 딸이 태자비(太子妃)가 되니 <고려사> <후비열전(后妃列傳)>에 “강종(康宗) 사평왕후(思平王后) 리씨는 의방의 딸로 강종이 태자였을 때 맞아들여 수령공주(壽寧公主)를 낳았는데 의방이 죽음을 당하자 쫓겨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볼 때 리의방은 한때 제일의 권력자로 부원군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으나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18일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보낸 중 종감(宗?)에게 피살되니 그 집안은 만고 역적의 집안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1170년(고려 의종 24) 혁명을 일으킨 지 4년만의 일이었다. 리의방이 피살되자 정중부는 왕명을 빌어 형 준의와 동생 인 등 1백여 명을 참살했다고 김영곤(金英坤)이 지은 <고려왕비열전>에는 적고 있다. 이 때 태자비는 임신 8개월이라 의종 임금이 보류해 두었었는데 두 달 후에 딸을 낳고 이듬해 3월에 폐출해 버렸다.
그러니 인(璘)과 인(隣)을 동일인으로 본다면 우리 선원선계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치 욕적인 면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 분을 별개의 인물로 볼 때는 우리의 <선원계보>대로 단 순해지나, 요는 인(璘)공이 내시집주(內侍執奏) 벼슬이란 것과 문극겸의 딸을 아내로 맞으신 것이 똑같기 때문에 따로 떼어 생각하기도 어렵다.  내시집주란 왕명의 출납(出納)과 숙위(宿衛)의 임무를 띠고, 임금 곁에서 복무하는 조선조 때 승정원 내 관리같이 생각되는데, <고려사>에는 `1174년(고려 명종 4) 12월 계해일에 리 린(李隣)을 집주(執奏)로 임명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고려사> · <씨족원류> · <고려왕비열전> 등의 기록대로 인(璘)과 인 (隣)이 같은 분이라 가정하면 용부(勇夫) 공의 자녀는 4남 1녀가 되고, 1174년(고려 명종 4) 에 준의 · 의방 · 인 세 분이 동시에 작고한 것이 된다. 그러면 <선원계보>에서는 왜 준 의 · 의방을 제적했는가?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고려 시대이지만 나라의 역적으로 몰린 분들이라 족보에서 빼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1174년부터 1392년까지는 218 년 간이다. 16세 인(璘)공부터 태조고황제까지는 6대의 기간이니, 30년을 1세로 치면 그럴 듯하게 맞는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의를 제기할 근거도 없지 않다.
< 씨족원류>에 따르면 인(璘)공의 아들로 양무(陽茂)장군과 딸 유택(柳澤)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용부공의 아들로 휘는 인이고 내시집주(內侍 執奏)란 벼슬을 지냈다 비위는 남평문씨(南平文氏)로 시중(侍中)을 지낸 문극겸(文克謙 : 1122∼1189)의 딸이다 공이 장성하시자 무예가 매우 교묘하시어 40보 밖에서 버들 잎을 쏘시는데 백발백중하셨다 그러나 인공이 전쟁에 패하여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 이 소식을 왕이 듣고 삼공(三公)에게 물으니 부의대부(副議大夫) 황후의(黃後議)가 대답하기를 인의 재주가 뛰어났는 데도 그리 된 것은 때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라고 했다 왕이 다시 말하기를 경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이요 하자 황후의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대극(奇大極)에게 들었는데 우리 나라가 장차 망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완산리씨가 뒤를 잇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왕이 기대극을 불러다가 묻기를 리씨가 왕이 될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니 기대극 이 대답하기를 신이 기린산맥(麒麟山脈)을 살펴보니 반드시 왕이 일어날 곳입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그 무덤을 파내고자 하니 기대극이 말하기를 옛부터 제왕이 성을 바꾸어 계승함은 하늘의 이치입니다 옛 사람 김지원(金志元)이 그 무덤을 이장하려다가 도리어 벼락을 맞아 죽었으니 어찌 무덤을 파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아예 그런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편목(編目)이란 책에 나무의 아들[李]이 양을 타고 고기를 잡으러 간다[魚羊]고 하였는데 지금 그 중이 아직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으나 신년(申年 : 壬申年 1392) 이 멀지 않았으니 반드시 걱정이 됩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왕이 지사(地師)더러 기린산맥 을 살펴보고 오라하니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산맥을 살펴보니 자손들이 끊길 형국이라 별로 왕이 일어날 곳이 못 됩니다 라고 하였다 왕은 이어 그렇다면 기대극의 흉칙한 말은 어째서 생겼느냐 하고 두 사람을 불러 대질시키니 기대극이 묻기를 기린산이 어떤 좌향(坐向)인가 하자 지사가 대답하기를 계좌정향(癸坐丁向)이오 라고 하였다 기대극이 말하기를 그 곳은 해좌사향(亥坐巳向)이란 용과 뱀이 구슬을 다투는 형국이요 천명이 반드시 영험할 것이요 기린산은 금강산의 산맥이 뻗어와 용과 물이 꼭 맞아 용이 구오 (九五 : 王位)에 펼쳐 있어 그것이 베푸는 은혜가 물고기[魚]나 양(羊)에까지 내리는 격이요 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대로하여 인(璘)공의 가족을 모두 죽이려다 길성(吉城 : 吉州)으로 귀양 보내고 군사 3백 명을 파견하여 무덤을 파내게 하였는데 그 군인들이 모두 향린 산 밑에서 벼락을 맞아 몰살했다 이에 왕은 탄식하여 하늘이 하는 일이라 인력으로는 할 수가 없구나 하고 드디어 중지했다 부인 문씨는 세 살짜리 아들을 안고 길성에 이르니 이 곳은 이 때 오랑캐 난이 일어났고 계속 수년 간 가뭄이 들어 생계가 막연했다 게다가 대간(臺諫)들의 탄핵으로 경산(慶山)으로 이배(移配)되어 몇 해 동안 갖은 고생을 다했는데 왕이 또 안남(安南)으로 이배하라 명령하니 여러해 동안의 간난신고야 말로 차마 견디기 어려웠다

 

 

17세() / 양무(陽茂) 장군공(將軍公)

 

16세 인공의 아들로 이름은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배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준경모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 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배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영경모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준영경모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 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르며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곧 백우 금관(白牛金棺) 설화다.

 

활기리에서 앞재를 넘어 준경묘에 이르면 두타산(頭陀山) 줄기에 신좌을향으로 양무장군의 묘가 모셔져 있는데, 안산을 바라보며 좌로 근산, 우로 대명산이 있고, 뒤로 방위산과 역마산이 있어 5봉으로 둘러싸여 있다. 산세를 보면 우백호는 우뚝하고 좌청룡이 미약하므로 전주리씨 후손은 장손들이 허약하다는 것이다.

조선 개국 160여 년 전에 양무장군께서 이곳에서 돌아가시자, 목조대왕께서는 선친의 묘 자리를 찾고 있었다. 마침 나무하러 두타산으로 올라갔던 집의 일꾼이 나무를 하다 쉬고 있 는데, 근처에서 도승과 상좌승이 앉아 산맥을 보며, “저 곳에 묘를 쓰면 5대 후에 임금이 나겠다”는 도승의 말을 듣고, 나무하다 말고 뛰어 내려와 주인인 목조대왕에게 알렸다.

목조대왕은 급히 달려가 도승 일행을 만나 백방으로 간청하니, 그 도승이 그 자리를 가리켜 주는데, 대신 어려운 조건이 제시되었다. 곧 개토제(開土祭) 때 소 1백 마리를 잡아야 하고, 관은 금관을 써야 효험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에 목조대왕은 고민 끝에 편법을 쓰기로 하였 다. 곧 처가에 마침 흰소가 한 마리 있어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체하고, 금으로 관을 만들 형편이 못 되니 황금 빛깔의 밀짚(일설에는 귀리짚)으로 관을 씌워 금관에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백우금관설화가 탄생한 것이다.

이때 백우(百牛)를 백우(白牛)로 대신하여 1천년 사직이 반으로 줄어 5백년을 유지했다고 도 하고, 준경묘 사방 5봉의 산 수명이 각각 1백년이라 도합 5백년의 조선왕조의 수명이 되 었다고도 한다. 하여간 이 준경묘 자리는 오늘날도 풍수를 따지는 사람은 우리 나라 제일의 명당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장군'이란 벼슬은 고려시대에는 무관의 정4품 벼슬로 `대장군\'(종3품)과 `중랑장(中郞將 : 정5품)'의 중간 직위이다.

< 고려사> 「선거지(選擧志)」에 `1221년(고려 고종 8) 4월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최 선단(崔先旦)이 과거급제자 이양무(李陽茂) 등 86인을 선발했다'는 구절이 있어 `이양무'란 이름이 <고려사>에 단 한번 비치는데, 양무장군이 바로 이분인지는 확신이 없다. 동명이인 일 것이다.

또 <완산실록>에는 양무장군에 대한 일화가 없고 대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이 런 일화가 있다. 양무장군은 덕만(德蔓 : 德滿)으로 표기되어 있다.

 

덕만이 조실부모하고 경흥부(慶興府)로부터 안정부(安定府)로 옮겨와 사락(謝樂 : 오랑캐 이름)의 집에서 목동 노릇을 했다. 소와 말 1천여 마리를 기르는데, 하루는 근방의 노인 20여 명이 산에 올라 화전(花煎)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노인들이 덕만을 보고, 자기들에게 와서 심부름이나 하면 편하게 살게 해 주겠다고 유혹했다. 그러나 덕만은 의리상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노인들이 감복하여 위로했다.

그 노인들 틈에 윤학(尹鶴 : <충효전>에는 李確)이라는 노인이 밤에 꿈을 꾸는데, 흰 용이 천랑산(天狼山 :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부터 날아서 딸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에 놀란 그 노인이 딸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되, “엊저녁에 어떤 건장한 청년이 방으로 들어와 덮치는데 소리를 질러도 말이 입에서 안 나오고, 몸을 틀어도 몸이 빠져 나가지 않아 일을 당하고는 이름을 물으니 사락의 집 목동 덕만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이에 그 노인이 천생연분이라 여기고 그와 결혼을 시켰다.

물론 황당무계한 설화이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은 모두 우리의 시 조로부터 태조고황제 개국 전까지의 일화를 창작하여 소설화한 것으로 흥미 본위의 야담류 (野談類)  의 작품이니 사료적 가치로야 별로 칠 것이 없지만 이런 유행본(流行本)이 있다는 것만으로 도 갸륵한 현상이라 하겠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 소를 영경묘 ·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 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 영경묘 · 재실 ·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 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 영밀(英謐) · 영습(英襲) 3형 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기록은 없다.

 

인공의 아들로 휘는 양무이며 벼슬은 장군(將軍)을 지냈다  비위는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이강제(李康濟)의 딸이다

전주에 살다가 아들인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삼척 이주(三陟移住) 때 삼척 활기리(活耆里) 로 옮겨 왔고 거기에서 1231년(고려 고종 18) 별세하여 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노 동(蘆洞) 신좌을향(辛坐乙向) 준경묘(濬慶墓)에 모셔져 있다

비위 이씨도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동산리(東山里) 묘좌유향(卯坐酉向) 영경묘(永慶墓)에 모셔져 있다

1899년(광무 3) 4월 16일 고종황제가 준경묘  영경묘라고 묘소에 존호(尊號)를 올리고 양쪽에 묘비와 음기(陰記)를 고종황제가 친히 지었다 그 내용은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조 개국 초에 삼척군을 삼척부로 승격시키고 금관(金冠)과 옥대(玉帶)를 삼척 원에게 하사하고 도백(道伯)에게 명하여 해마다 두 묘소를 보살피게 했으나 점점 폐허화되어 선조 때 정철(鄭澈 : 1536∼1593)이 강원 감사로 있을 때 산소의 지도까지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요청한 일이 있다

그 뒤 다시 수축하고 대대로 산소의 수호와 벌목의 금지 등 보호에 애써 왔다 그러다가 1899년에 고종황제가 재상 리중하(李重夏)를 파견하여 묘소를 재정화하고 구역을 확정하고 비를 세우고 내력을 음기로 새기게 하였다 이로 보면 1899년부터 준경묘 영경묘라 추존되고 대대적으로 수축해 오늘의 모습이 갖추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이 곳 사람들은 이 두 묘를 능이라고 부른다

또 활기리에는 목조대왕이 살던 집터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양무 장군 내외분의 묘 소를 영경묘 준경묘라고 추존할 때 목조대왕 구거유지비(穆祖大王 舊居遺址碑)를 세웠 는데 고종황제 어제로 되어 있다 따라서 준경묘 영경묘 재실 목조대왕구거유지 등을 합쳐 1981년 8월 5일 강원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받았다

그런데 <씨족원류>에는 양무장군에게 여동생이 있어 유택(柳澤)에게 시집 간 것으로 되 어 있는데 그 근거를 아직 찾지 못했다

양무공은 4남을 두었는데 목조대왕 이외에 영필(英弼) 영밀(英謐) 영습(英襲) 3형 제를 두었다 그러나 영필 영밀은 자손이 없고 영습공만 후사를 두어 선원선계 세번째 파계인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줄여서 주부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주부공파에서는 목조대왕이 주부공의 아우라고 하나 이를 증명할 기록은 없다

 

 

18세() / 목조대왕(穆祖大王)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휘는 안사(安社)요 고려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비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 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완산실록><동국세기><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부분적으로 자구(字句)가 틀릴 정도이다

목조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신데  하루는 꿈에 청의동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공의 선대에 하느님께서 주신 물건이 있으니 잘 간직하시오 후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 라고 하셨다  그래서 꿈을 깨어 찾아보니 구슬도 아니고 돌도 아닌 술잔 같은 것이 있었다 이에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어느 날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에는 天狼山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시는데 한 노파가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대왕께 물었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보물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 그 노파가 말하기를  향린산(香麟山 : <충효전>에는 香因山)에 천 년 묵은 청학(靑鶴)이 선동(仙童)으로 변하여 용궁의 보물을 훔쳐다가 준 것이요  하며  보여 달라 하기에 보여 주니 그 노파가 보고서  이것은 용궁 깊숙히 간직해 두었던 활과 화살인데 그 선동이 어떻게 훔쳐 갔는지 알 수가 없군  했다  이에  대왕이 묻기를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그 노파가 대답하기를 속세의 인간들이 내가 용녀(龍女)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거룩한 천명이장차 공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백호도(白虎刀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白龍휢)를 전해 주려고 왔노라 고 하면서  좋은 칼을 주므로  대왕은 받고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찰라에 그 노파는 사라져 버렸다

태조고황제의 고조부인  목조대왕은 1274년(고려 원종 15)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공주(孔州 :慶興)의 성(城) 남쪽 5리에 장사지냈다 그 후1410년(태종 10)경인년에 함흥 서북쪽 가평사(加平社)의 계좌원(癸坐原)으로 이장되었다 덕릉(德陵)이 바로 이곳이다

 

 

19세() / 익조대왕(翼祖大王)

 

목조대왕의 제4남으로 휘는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대왕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 임좌 (壬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비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인데  본관은 등주(登州)요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대왕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갑좌(甲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정숙왕후  최씨가 승하하여 상여가 출발하여 지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고개에 이르자 상여가 갑자기 저절로 부서져 더 갈 수가 없었다 이에 연을 날려 내려 앉은 곳에 장례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숙릉 자리라 한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겨 그 고개 이름을 거파령(車破嶺)이라 하니 지릉의 서북쪽 10리 되는 곳이라 한다 익조대왕은 8남 1녀를 두었으니  사자(嗣子)인 도조대왕은 차례로 넷째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캽)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충효전>에는 익조대왕의 휘를 행(幸)으로 적고 있다

익조대왕은 어릴 적부터 용력이 절륜하고 무예가 특출하여서 군인이 되었는데  그 때 오랑캐인 멍꺼두(蒙可毒 : <동국세기>에는 蒙哥)가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이 때 익조대왕도 할 수 없이 출정하였는데  집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술잔 같은 물건만 잘 간직하고 떠났다 그리하여 요락지(瑤樂池 : <동국세기>에는 龍興江 <충효전>에는龍登江) 근처에 이르니 일시에 검은 구름과 누런 안개가 천지를 가려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걷히어 세상이 환한 가운데 동전 10개가 길가에 흩어져 있어 그것을 주워 가지고 갔다 그 때 북절도사(北節度使) 오칙경(吳勅敬 : <동국세기>에는 北節使 吳致慶 <충효전>에는 北哲士 務京)의 꿈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군대 안에 한 부대장이 용검(龍劍)과 궁시(弓矢)를 차고 왔 다  하므로 절도사가 그 사실을 조사할 때 흰 말을 탄 젊은 군인들이 수없이 행군하면서 떠들썩했다

그들은 모두 명장군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므로 자세히 보니 그들 앞에 용검과 궁시를 찬 장군이 있고 그 장군을 본 그 많은 군사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북절도사는 그 물건을 탐내어 군율을 악용하여 익조대왕을 때리고 그 술잔 같은 물건을 빼앗았다

그 날 저녁 익조대왕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전에 준 중요한 물건을 어째서 오가놈에게 빼앗겼소  목조대왕의 영혼이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太白山)으로 들어가 사람으로 화하여 오늘 밤에 선관(仙官)의 모습으로 백마를 타고 여기에 오실 것이다 라고 했다 익조대왕은 꿈을 깨자 향을 피우고 꿇어 앉아 기다리니 과연 흰 말을 탄 선관이 나타났다  익조대왕이 그간의 일을 고하니 선관이 한탄하면서 이는 반드시 천명이로다 그 활과 화살을 쓸 때가 아닌데 그것을 사용했으니 누구의 죄인가? 그대는 본대  선대부터 덕을 쌓은 집안의  후예이니 훗날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서 그 선관이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풀어 주면서 돼지해(己亥年 太祖誕降)에 왕이 될 후손이 태어날 것이다 라고 했다

익조대왕의 선친인 목조대왕은 고려의 의주(宜州) 병마사로 있었고 익조대왕은 1300년(고려 충렬왕 26)에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승사랑(承仕郞)의 벼슬을 얻었고  동시에 쌍성등처(雙城等處 : 永興地域)에 사는 고려 군인과 백성을 관령하였다 또 쌍성지역의  다루카치란 막강한 관직에 있으면서 그 동북면에 끼친 바 영향력이 컸었다              

태조고황제의 증조부인 익조대왕은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익조대왕의 부인은 손부인(孫夫人)으로서 함께 적도(赤島)까지 도피하는 등 초년 고생을 함께 하였는데 이 부인이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위수요 차남은 복(福)이라 하였다

후에  익조대왕은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에 장가들어 도조대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익조대왕은 8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도조대왕은 차례가 넷째이니 위로 형이 셋이요 아래로 아우가 넷인 셈이다 그래서 손부인이 낳은 두 아들이 함녕대군과 함창대군이고 나머지 다섯 아들과 딸이 정숙왕후 소생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8남1녀를 전부 정숙왕후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20세() / 도조대왕(度祖大王)

 

익조대왕의 제4남으로 휘는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고 후에 태종대왕이  공의성탁(恭毅聖度)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5남 3 녀를 두었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 임좌(壬坐)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비위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이니 본적은 문주(文州)요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고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 임좌(壬坐)에 있 다 표석이 있다 사자(嗣子) 환조대왕은 차례가 둘째요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 (文淑公主)는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경순왕후 박씨는 완창대군과 환조대왕만 낳고 박씨가 승하한 뒤 조씨(趙氏)에게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첫 아들이 완자불화(完者不花)요  다음 아들이 나해(那海)라고 하였다 그러니 5형제 중 아들 하나는 누가 또 낳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5남 3녀를 모두 경순왕후 박씨가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다 도조대왕이 소시적에 경산(慶山)으로 길을 가는데 어느 날 일본의 사신이  북해(北海)의  녹둔도(鹿屯島)로 들어가기 때문에 경산 길로 가다가 도중에서  도조대왕을 만났다  일본 사신은 수레에서 내려 도조대왕께 절을 하고서  말하기를 용의 자손이 어찌 이런 곳을 다오셨습니까? 나으리는 비록 그때를 보시지 못하시지만 반드시 왕이 되실 손자를 낳으실 것입니다 앞으로 요사스러운 중과  요망한 여자가 궁중에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도조대왕이 우러러보며 대답하되 저같이 이렇게 곤궁한 사람이 그런 끝없는  복을 어찌 받을 수가 있겠소이까  하니 일본 사신이 말하기를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습니까 하고 그가 지녔던 활과 화살을 풀어 주고 가 버렸다 탄강 설화(誕降 說話) 익조대왕은 두만강 하류변 오동(斡東) 땅 적도에서  덕원으로 37년만에 되돌아오자 처음에 등주(登州 : 安邊) 고을의 협촌이란 곳에서 30호평(戶坪)의 영업전(永業田)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이 지났어도 아들이 없는지라 배위인 정숙왕후 최씨(崔氏) 와 함께 강원도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들어가서 기도하였다 이 관음굴은 지금도 강원도  양양(襄陽) 의상대(義湘臺) 뒷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숙왕후가 관음굴에서 돌아온 후 꿈에 중이 나타나 이르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선래(善來) 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과연 얼마 안가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선래 라고 지었는데 곧 도조대왕이다

 

 

21세() / 환조대왕(桓祖大王)


도조대왕의 제2남으로 휘는 자춘(子春)인데 자도 자춘이다 1315년(고려 충숙왕2)에 탄생하고  고려때에 벼슬하여 영록대부(榮祿大夫)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 삭방도만호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고 1360년(고려 공민왕 9) 4월 갑술일(<태조실록>에는 庚戌日)에 승하하니 46세였다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1394년(태조 3)11월 6일에 환왕(桓王)으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연무성환(淵武聖桓)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795년(정조 19) 영흥 본궁(本宮)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4월 27일에  본궁 이안청(移安廳)에서  신판(神板)을 만들어 4월 26일 본궁 정전(正殿)에 모셨다 3남 1녀를 두셨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으며 1360년 8월에 장례지냈다  신도비와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를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비위는 의혜왕후(懿惠王后) 최씨이니 본적은 영흥(永興)이요 원나라에서 천호(千戶)를 받고 조선조에서 판문하(判門下) 영흥백(永興伯) 정효공(靖孝公)을 추증받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이다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의 봉작을 받고 2월 24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11월 6일에 의비(懿妃)에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의혜(懿惠)라 더 존호를 올렸다  1795년(정조 19)에  영흥 본궁에 신주를 모실 때 대신과 예조 당상관을 보내어 4월 21일에 본궁 이안청에서 신판을 만들어 26일에 본궁 정전에 모셨다 1남 1녀를 낳았다 능은 화릉(和陵)으로  환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표석이 있다 1900년(광무 4)에 도의 책임자에게 명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비문과  글씨는 고종황제가 친히 썼다 사자는 태조고황제이고 장녀는 정화공주(貞和公主)로서 삼사좌사(三司左使)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환조대왕은 따로 두 배위를 두었다 한 분은 이씨(李氏)로서  완풍대군(完豊大君) 원계(元桂)를 낳았고 또 한 분은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金氏)로서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를 낳았다

<완산실록><동국세기><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환조대왕은 가난하여 방랑하느라고 늦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셨다 그런데 그때 조조(趙祚 : <동국세기>에는 趙助 <충효전>에는  趙礎)란 갑부가 있어 자식은 무남독녀라  훌륭한 가문의 신랑 (<동국세기>에는  金仁智의 아들 <충효전>에는 金之仁)을 맞아들여 재산의 반을  주고 노후를 위탁하려 했다 그러나 그 딸은 천생배필이 따로 있다고 거절하고  버티었다  그런데 갑술년 3월 7일에  환조대왕이 매우 남루한 옷차림으로 조조네 집 사랑채 툇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이때 그 처녀가 낮잠을 자다 꿈을 꾸니 두 마리 용이  하늘로부터  내려 와 한 마리는 울타리 밖에 서려 있고 또 한 마리는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 처녀는 곧 하인을 보고 밖을 살펴 보라 하니  환조대왕이  밖의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지라  부모에게 종용하여 맞이해다가  날짜를 택하여  혼인하니 이 한쌍의 부부는 요조숙녀(窈窕淑女)요 군자호구(君子好逑)라 했다 이에 이 소문이 7월 18일에 경산태수(慶山太守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慶興府使) 안유(安裕)의 꿈속에 조짐으로 나타나 알게 되고  또 당시 동요에  주초 (走肖 :趙)가 이 여자를 낳았고 이여자가 용손을 낳는다네(走肖生是女 是女生龍孫) 라는  말이 유행하여  안유가 조조를 불러  신분을 감추라고 권유하며 조조는 어머니 성을 쫓아 최씨로 성을바꾸니   이분이 최한기(崔閑奇)로서 태조고황제의 외조부라 하였다  그리고 이 최씨 여인이 잉태한지  14개월만인 을해년 10월 11일 묘시에  아들을 낳으니 곧 태조고황제이다

 

 

22세() / 의안대군(義安大君)

 

환조대왕과 정안옹주(定安翁主) 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화(和)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 시호는 양소(襄昭)이다.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綠大夫)이며 태조고황제의 동생이다. 고려 공민왕 때 대장군으로서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고 우왕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고황제를 도와 활약하여 1393년(태조 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1389년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개국공신이 되었다. 1392년(태조 1) 순충좌명(純忠佐命)개국1등공신 녹권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1395년(태조 4) 태조고황제를 모시고 조정에서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개국공신 정도전은 <삼봉집(三峯集)>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 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았다. 1400년(정종 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태종 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1등공신 녹권을 사급받고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02년(태종 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한편 그 해 10월 13일에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소?”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 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1404년(태종 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환조대왕이 1360년(공민왕 9)에 승하하자 태조고황제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한편 공민왕은 태조고황제를 존경하는 까닭에 정안옹주 김씨의 아들 의안대군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귀한 음식물을 내려 어머니 김씨에게 드리도록 하였다. 공민왕의 지극한 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어머니 김씨에게는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고황제도 공민왕의 이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407년(태종 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1408년(태종 8)에 돌아가니 향년 61세였으며 태조고황제가 승하한 지 다섯달 뒤였다. 1410년(태종 10) 7월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배향되었다.

 


23세() / 완천군(完川君,1373--1406)-의안대군


대군의 차남이며 휘는 숙(淑), 시호는 제의(齊懿)이다. 1401년(태종 1)에 완천군(完川君)으로 봉해졌다. 완천군은 부친 의안대군과 함께 태조고황제를 도와 개국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숙종대왕은 이런 부자의 높은 공을 기려 `양세원훈(兩世元勳)'이라 친필을 내렸다.
1398년(태조 7)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로 임명되고, 1401년(태종 1) 좌명1등공신 녹권을 받고 완천군으로 책봉되었다. 1405년(태종 5) 의정부 찬성사에 제수되었다. 1406년(태종 6) 10월에 별세했으며, 이 때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제문을 내려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
묘지는 광주군 노우개 일안인데 장남 하령군 양(穰)이 계유정난에 3상신(相臣)과 함께 순절하여 실전되었다.

 

 

24세() / 하릉군(河陵君,?--?)-완천군

 
휘는 확(穫), 대군의 손자이며 의정부 좌찬성인 하령군의 아우이다. 1872년(고종 9)에 하릉군(河陵君)으로 봉군되었다. 하령군이 절손됨에 따라 1등개국공신 영의정부사 의안대군 종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25세() / 순흥군(順興君,?--?)-하릉군


순흥군(順興君) [ ? ∼ ? ]
휘는 수로(守老), 대군의 증손(曾孫)이며 하릉군의 2남이다. 1877년(고종 9)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되었다.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며 대군의 종손(宗孫)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이다.

 

전주이씨 (全州李氏) 계보도(系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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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안대군의 5대조

17세() 양무(陽茂) 장군공(將軍公) 의 묘(준경묘)

강원도 삼척 활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