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조대왕 (度祖大王) 이야기
19세 익조대왕의 제4남으로 이름은 춘(椿)인데 처음 이름은 선래(善來)요, 몽고명은 패안첩목아이다.
함흥(咸興) 송두등리(松頭等里)에서 탄생하여
1342년 (고려 충혜왕 복위 3) 7월 24일에 승하하니 고려 조정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하였다.
1394년 (태조 3) 11월 6일에 도왕(度王)으로 추존되고 후에 태종대왕이 공의성탁(恭毅聖度)이라고 존호를 올렸다. 5남 3 녀를 두었다.
능은 의릉(義陵)으로 함남 흥남시 운남면 운흥리 임좌(壬坐)에 있으며 표석(表石)이 있다.
배위는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이니
본적은 문주(文州)요
원나라에서 천호벼슬을 받고 조선조 때 문하시중에 증직된 안변부원군(安邊府院君) 박광(朴光)의 딸이고 7월 23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 (태조 3) 11월 6일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태종대왕이 경순(敬順)이라 존호를 올렸다.
5남 3녀를 낳았고 능은 순릉(純陵)으로 함남 흥남시 마전리 임좌(壬坐)에 있 다. 표석이 있다.
사자(嗣子) 환조대왕은 차례가 둘째요,
장남 완창대군(完昌大君)은 자흥(子興)이요,
3남 완원대군(完原大君)은 자선(子宣)이며,
4남 완천대군(完川大君)은 평(平)이요,
5남 완성대군(完城大君)은 종(宗)이다.
장녀 문혜공주(文惠公主)는 대장군 문인영(文仁永)에게 시집갔고,
차녀 문숙공주(文淑公主)는 다루카치 김마분(金馬粉)에게 시집갔으며,
삼녀 문의공주(文懿公主)는 허중(許重)에게 시집갔다.
그런데 <태조실록>에는
경순왕후 박씨는 완창대군과 환조대왕만 낳고 박씨가 승하한 뒤
조씨(趙氏)에게서 두 아들과 세 딸을 낳으니,
첫 아들이 완자불화(完者不花)요,
다음 아들이 나해(那海)라고 하였다.
그러니 5형제 중 아들 하나는 누가 또 낳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5남 3녀를 모두 경순왕후 박씨가 낳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적혀 있다.
도조대왕이 소시적에 경산(慶山)으로 길을 가는데
어느 날 일본의 사신이 북해(北海)의 녹둔도(鹿屯島)로 들어가기 때문에 경산 길로 가다가 도중에서 도조대왕을 만났다.
일본 사신은 수레에서 내려 도조대왕께 절을 하고서 말하기를 “용의 자손이 어찌 이런 곳을 다 오셨습니까?
나으리는 비록 그때를 보시지 못하시지만 반드시 왕이 되실 손자를 낳으실 것입니다.
앞으로 요사스러운 중과 요망한 여자가 궁중에서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도조대왕이 우러러보며 대답하되 “저같이 이렇게 곤궁한 사람이 그런 끝없는 복을 어찌 받을 수가 있겠소이까?” 하니,
일본 사신이 말하기를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찌 씨가 있습니까?” 하고 그가 지녔던 활과 화살을 풀어 주고 가 버렸다.
탄강 설화(誕降 說話)
익조대왕은 두만강 하류변 오동(斡東) 땅 적도에서 덕원으로 37년만에 되돌아오자
처음에 등주(登州 : 安邊) 고을의 협촌이란 곳에서 30호평(戶坪)의 영업전(永業田)을 경영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거주한 지 수년이 지났어도 아들이 없는지라
배위인 정숙왕후 최씨(崔氏) 와 함께 강원도 낙산(洛山)의 관음굴(觀音窟)에 들어가서 기도하였다.
이 관음굴은 지금도 강원도 양양(襄陽) 의상대(義湘臺) 뒷쪽에 그대로 남아 있다.
정숙왕후가 관음굴에서 돌아온 후 꿈에 중이 나타나 이르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선래(善來)'라고 하십시오.” 하였다.
과연 얼마 안가서 아들을 낳아 이름을 `선래'라고 지었는데, 곧 도조대왕이다.
사룡 설화(射龍 說話)
도조대왕이 부친인 익조대왕의 벼슬을 이어받아 경흥(慶興) 망덕산(望德山) 아래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남지(南池)에 있는 용인데 나그네 용이 나타나 내 연못으로 와서 내 집을 빼앗으려 하니 나는 견딜 수가 없소.
내 듣자니 그대는 활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오. 원컨대 한 대의 화살로써 나의 강적을 물리쳐 주기 바라오.
이 일이 이루어지면 그 공덕을 잊지 않고 후손에게 갚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도조대왕은 승락하고 이튿날 활통을 차고 경흥부 남쪽 산기슭으로 가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며 운무가 자욱한 가운데
동북쪽으로부터 흑룡이 달려와 백룡과 어우러져 싸우는데
긴 몸을 꿈틀대며 서로 엉키어 물어뜯고 싸우므로 그 번들거리는 비늘이 번개불같이 눈이 부셨다.
이때 도조대왕이 활을 쏘려 하나 주객을 분간할 수가 없어 끝내 활을 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날 밤 꿈에 다시 그 노인이 나타나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기에
대답하기를 “어느 편이 나그네 용인지를 알 수가 없어 못 쏘았습니다.” 하니,
그 노인이 말하기를 “백룡은 나이고 흑룡은 그놈이니 내일은 실수하지 마시오.”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도조대왕은 남산기슭으로 올라가 보니 두 마리 용이 어우러져 한바탕 싸우고 있었다.
곧 활을 당겨 흑룡의 허리를 쏘니 흑룡은 피투성이가 되어 달아나고 연못은 핏물로 빨개졌다.
그래서 그 연못을 적지(赤池)라고 하고 또 사룡연(射龍淵)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전설에 의하면
그때 그 흑룡이 화살을 맞고 바다로 나갈 때 강가 절벽을 99번 쳐서
붉은 절벽이 아흔아홉 구비로 10리나 된다 한다.
그뒤 그 백룡이 꿈에 다시 나타나 도조대왕에게 사례하면서
“그대의 경사가 바야흐로 자손에게 있을 것이요.”라고 했다.
정조대왕은 이 적지에 기적비명(紀蹟碑銘)을 세웠다.
일시중이작 설화(一矢中二鵲 說話)
도조대왕은 이렇게 명궁(名弓)이었다.
일찍이 진영(陣營)에 있을 때 두 마리 까치가 진영 가운데 있는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도조대왕이 그 까치를 쏘려 하니 나무와의 거리가 1백보나 되어 부하들이 모두 맞추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도조가 활을 쏘자 한 대에 두 까치가 함께 맞아 땅에 떨어졌다.
때마침 큰 뱀이 그 까치들을 물어다가 다른 나무 위에다 올려 놓고 먹지는 않았다.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 칭송이 자자했다.
안변(安邊)의 대농장(大農場)
도조대왕은 원나라 황제의 칙명에 의하여 선친의 관직을 물려받았거니와, 그 이어받은 당연직은 둘이 있었다.
그 하나는 영업전의 경영이었고, 또 하나는 동북면에서 고려 사람들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이 때 고려는 처음의 문벌귀족(門閥貴族)시대 약 250년 간은 공전제도(公田制度)가 그런 대로 계속되어 왔으나
다음의 무신집권시대 약 100년 간은 공전이 점점 사전(私田)으로 바뀌고 말았으며
끝으로 약 100년 간을 사전이 다시 점점 권문(權門) · 세족(勢族) · 사원(寺院) 등의 대지주의 양상으로 변천하였던 것이다.
목조대왕은 고려 무신집권시대에 있었고 익조대왕 · 도조대왕 · 환조대왕은 고려의 권문세족시대에 있었다.
그러나 태조고황제는 전제(田制)의 개혁을 일으켜
고려의 권문세족시대를 이른바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시대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도조대왕은 안변 이북의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선친의 30호평을 물려받은 시대로 말하면 고려의 권문세족의 시대인지라
이 시대의 권문과 세족과 사원 등은 다투어 대지주가 되어 더러는 한 고을 넓이의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도조대왕이 물려받은 30호평도 시대적 조류를 타고 엄청나게 크게 번창하였던 것이다.
안변에서 북으로 덕원에 이르는 전토의 거의가 도조대왕의 대농장 권내에 들어간 것이 아닌가 살펴진다.
그러나 도조대왕은 소유 내지 위탁받은 바 가칭 천호평(千戶坪)의 대농장은
그 당시의 권문세족이나 사원 등의 대농장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이 있었다.
도조대왕의 부병영업전(府兵永業田)인 대농장은
일단 국가가 위급할 때를 당해서는 수천 병정을 먹여 살리는 성질의 것이었다.
따라서 환조대왕 · 태조고황제의 사병 2천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 무렵 도조대왕은 서울(開京)에 올라가 충숙왕을 뵈오니, 왕의 하사품이 많았다. 이는 충성을 권장하기 위해서였다.
동북민 관령(東北民 管領)
윤관(尹瓘 : ?∼1111) 장군은
고려가 여진족(女眞族) · 거란족(契丹族)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천리장성(千里長城 : 12년 공사, 1044년에 완성)을 쌓은 지 65년 후인 1108년(고려 예종 3)에
17만 대군으로 여진을 격파하여 정평(定平)과 함흥(咸興) 사이의 정계선(定界線)을 깨뜨리고,
드디어 고려인을 함흥지역에 진출시켰던 것이다.
이 고려인이 함흥에 진출한 해로부터 190여년 후인
1300년(고려 충렬왕 26) 이후의 고려인을 관령하기 위하여
익조대왕은 덕원에서 영흥(永興 : 和州) · 함흥(咸興 : 咸州)으로 왕래하였으며
도조대왕은 덕원에서 영흥 · 함흥으로 이주하였다.
원래 고려정부는 함경도의 동북면과 평안도의 서북면인 동쪽 · 서쪽의 여진 접경지대에
고려인이 많이 들어가 살 수 있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즉 양계입거법(兩界入居法)이라고 하는 법을 제정하여 이 지역에 강제로 민가를 늘렸다.
이윽고 익조대왕은 쌍성등처(雙城等處)의 동북면에서 고려인을 관령한 후부터는
더욱 함흥지역에 남쪽 백성을 많이 모여들게 하였다.
또 도조대왕은 이 함흥지역에 많이 모여든 고려인에 대한 목양(牧養 : 먹여 살림)을 위해서
안변 땅인 가칭 `천호평'의 대농장을 그대로 둔 채 처음은 영흥으로, 다음은 함흥으로 이주하였다.
이것은 바로 동북면의 고려인을 관령해 온 선대로부터의 유업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무릇 덕(德)이 있으면 사람이 모여드는 법인지라,
도조대왕은 관대한 아량으로 아랫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이다.
곧 동북면에서의 오합지중(烏合之衆)은 결합지중(結合之衆)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 결속된 친병(親兵)으로 하여금
환조대왕은 동북면을 원나라의 속령으로부터 단숨에 탈환하였으며
또 태조고황제는 이어받은 친병 2천으로 하여금 나하추(納哈出 : ?∼1381)를 함 흥평야에서 격파하고
홍건적(紅巾賊)을 개경(開京)에서 격퇴시키고 왜구를 나라 안 도처에서 물리친 것이다.
[출처] 덕원 행적(德源 行蹟) |작성자 지식스닷컴
[ 제328호] / 등록일 : 2013.05.27 11:40:54 [이상주 종묘스토리 12 조선개국실화]
손자의 조선 개국 꿈 꾼 도조대왕(度祖大王)
태조실록에 바탕, 완산실록·동국세기 등에 도조의 용(龍) 일화 기록
도조대왕(度祖大王) / 위키백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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