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조대왕(翼祖大王) 이야기
18세 목조대왕의 제4남으로 이름은 행리(行里)요,
함경도 덕원(德源) 적전사(赤田社)에서 태어났다.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태조고황제가 익왕(翼王)으로 추존하고
그 뒤 태종대왕이 강혜성익(康惠聖翼)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지릉(智陵)으로 함경남도 안변군 서곡면 능리 임좌 (壬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배위는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인데,
본관은 등주(登州)요, 호장 기열(基烈)의 딸이다. 9월 2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정비(貞妃)로 추존하고 태종대왕이 정숙(貞淑)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숙릉(淑陵)으로 함경남도 문천군 문천면 능전리 갑좌(甲坐)에 있고 표석이 있다.
정숙왕후 최씨가 승하하여 상여가 출발하여 지릉으로 향하는 도중에
한 고개에 이르자 상여가 갑자기 저절로 부서져 더 갈 수가 없었다.
이에 연을 날려 내려 앉은 곳에 장례를 모시니 이곳이 바로 숙릉 자리라 한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겨 그 고개 이름을 거파령(車破嶺)이라 하니
지릉의 서북쪽 10리 되는 곳이라 한다.
익조대왕은 8남 1녀를 두었으니, 사자(嗣子)인 도조대왕은 차례로 넷째이다.
장남은 함녕대군(咸寧大君) 안(安)이요,
차남은 함창대군(咸昌大君) 장(長)이며,
3남은 함원대군(咸原大君) 송(松)이요,
5남은 함천대군(咸川大君) 원(源)이요,
6남은 함릉대군(咸陵大君) 고태(古泰)요,
7남은 함양대군(咸陽大君) 전(캽)이요,
8남은 함성대군(咸城大君) 응거(應巨)이다.
장녀는 안의공주(安懿公主)인데 증좌군도통제(贈左軍都統制) 주단(朱端)에게 시집갔다.
<완산실록> · <동국세기> · <충효전>에는 이런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충효전>에는 익조대왕의 휘를 행(幸)으로 적고 있다.
익조대왕은 어릴 적부터 용력이 절륜하고 무예가 특출하여서 군인이 되었는데,
그 때 오랑캐인 멍꺼두(蒙可毒 : <동국세기>에는 蒙哥)가 두만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이 때 익조대왕도 할 수 없이 출정하였는데,
집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술잔 같은 물건만 잘 간직하고 떠났다.
그리하여 요락지(瑤樂池 : <동국세기>에는 龍興江, <충효전>에는 龍登江) 근처에 이르니
일시에 검은 구름과 누런 안개가 천지를 가려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그러다가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걷히어 세상이 환한 가운데 동전 10개가 길가에 흩어져 있어 그것을 주워 가지고 갔다.
그 때 북절도사(北節度使) 오칙경(吳勅敬 : <동국세기>에는 北節使 吳致慶, <충효전>에는 北哲士 務京)의 꿈에
한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군대 안에 한 부대장이 용검(龍劍)과 궁시(弓矢)를 차고 왔다.” 하므로
절도사가 그 사실을 조사할 때 흰 말을 탄 젊은 군인들이 수없이 행군하면서 떠들썩했다.
그들은 모두 명장군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므로 자세히 보니
그들 앞에 용검과 궁시를 찬 장군이 있고, 그 장군을 본 그 많은 군사들은 모두 도망쳐 버렸다.
북절도사는 그 물건을 탐내어 군율을 악용하여 익조대왕을 때리고 그 술잔 같은 물건을 빼앗았다.
그 날 저녁 익조대왕 꿈에 한 노파가 나타나
“전에 준 중요한 물건을 어째서 오가놈에게 빼앗겼소?
목조대왕의 영혼이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太白山)으로 들어가 사람으로 화하여
오늘 밤에 선관(仙官)의 모습으로 백마를 타고 여기에 오실 것이다.”라고 했다.
익조대왕은 꿈을 깨자 향을 피우고 꿇어 앉아 기다리니 과연 흰 말을 탄 선관이 나타났다.
익조대왕이 그간의 일을 고하니,
선관이 한탄하면서,
“이는 반드시 천명이로다. 그 활과 화살을 쓸 때가 아닌데 그것을 사용했으니 누구의 죄인가?
그대는 본대 선대부터 덕을 쌓은 집안의 후예이니 훗날에 반드시 기쁜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서
그 선관이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풀어 주면서
“돼지해(己亥年. 太祖誕降)에 왕이 될 후손이 태어날 것 이다.”라고 했다.
천호 습봉(千戶襲封)
익조대왕은 선친이 삼척에서 이주해 온 곳인 덕원 용주리(湧珠里)에서 1243년(고려 고종 30)대에 탄강한 듯하다.
목조대왕이 원나라 개원로 정부 하의
남경등처 오천호소(南京等處 五千戶所 : 두만강 주변)의 수천호(首千戶)와 아울러
다루카치란 고급 관직에 있으며 두만강 주변 요충지인 4성(城)을 관령하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에 돌아가니,
이듬해인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아들인 익조대왕이 원나라 천호(千戶) 관직을 이어받았다.
그 뒤 1281년(고려 충렬왕 7)에 원 나라 세조 홀필렬(忽必烈 : 일명 쿠빌라이 Khubilai, 1216∼1294)은
일본(日本)을 정벌하려고 천하의 병선(兵船)을 합포(合浦 : 馬山)에 모았다.
익조대왕은 개원로 정부의 지시에 따라 본소(本所)의 호구 조사로 군인을 뽑아서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의 삼살천호(三撒千戶)와 몽고의 대탑실(大塔失)이라는 장부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아갔다.
이 때 익조대왕은 드디어 충렬왕(忠烈王)을 두세 번에 걸쳐 뵈었다.
익조대왕은 더욱 공손하고 삼가하여 아뢰기를,
“저의 아버님이 전주에서 북방으로 피하였던 것은 실은 호랑이(전주의 산성별감)의 입을 벗어났을 따름이옵고
감히 군부(君父)를 배반함이 아니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상감께서는 그 죄를 풀어 주옵소서” 하였다.
충렬왕이 이르기를
“경은 본시 사족(士族)인지라, 어찌 근본을 잊으리오. 이제 경의 거동을 보니 마음의 있는 바를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오동 탈출(斡東 脫出)
익조대왕이 고려의 충렬왕을 뵙고 돌아온 후부터는 더욱 그 위덕(威德)이 돋보이는지라
점점 여러 여진(女眞) 천호(千戶)의 많은 부하들이 마음으로 익조대왕을 따르는 것이다.
이로 인해서 여러 다른 여진 천호들은 익조대왕을 꺼려하기 시작하여
익조대왕을 모해(謀害)하려고 이르기를
“리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족이 아닌 이방인이다.
지금 형세를 보건대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한 것이 있다.
어찌 저 북쪽 깊은 곳의 우리 동족의 군사를 청해서 리행리의 무리를 제거하고,
그 남은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여러 여진 천호들은 익조대왕에게 거짓 아뢰기를
“우리들은 북쪽 땅에 가서 사냥하고 오겠으니 20일 동안만 만나지 말기로 합시다.”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기일이 지나도 이들을 볼 수가 없는지라,
익조대왕은 수상쩍게 여기고 친히 북쪽 여진 땅에 가까운 현성(峴城)이란 곳에 가 보니,
과연 노약자들과 부녀자들만이 있고 장정들은 보이지 않았다.
익조대왕이 돌아오는 길에 머리가 허옇게 센 노파를 만났다.
할머니가 이르기를
“공은 모르십니까? 귀관(貴官)의 위엄과 덕망이 애석하여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곳 여진족들은 귀관을 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3일 후면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황급히 돌아온 익조대왕은 일족에게 당부하기를
재산을 싣고 두만강 입구의 적도(赤島)에서 만나자고 약속하였다.
익조대왕은 이틀 후에 손부인(孫夫人)과 함께 북쪽 가양탄(加陽灘)을 건너서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았다.
과연 아른아른 먼 북쪽에 적병이 가득히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익조대왕은 적도 북쪽 물가까지 일사천리로 말에 채찍을 더하여 달렸다.
과연 천우(天佑)요, 신조(神助)였다.
바로 그 시각은 썰물[干潮] 때라 적도까지의 바닷물이 육지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백마를 탄 익조대왕은 부인과 무사히 건너고, 따른 자들도 모두 안전하게 건넜다.
얼마 후 적병은 익조대왕의 뒤를 쫓아왔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은 밀물[滿潮]때인지라,
이미 적도까지 바닷 물이 가득 차 있어서 적병들은 하는 수 없이 되돌아가고 만 것이다.
후대 사람들은 익조대왕의 이 사실을 일컬어 이르기를 “이것은 분명코 하늘이 도운 일이다”고 하였다.
익조대왕은 적도에서 움을 파고 살았다.
오동사람들은 익조대왕이 있는 곳을 알고 따라온 자가 많았다.
이 적도(赤島)는 두만강가 경흥부(慶興府) 남쪽 50리에 있는데, 사면의 산 벼랑이 붉다.
섬 둘레는 10리쯤 되고 지금도 익조대왕이 칩거하던 13개의 굴이 있다고 한다.
1787년(정조 11)에 정조대왕이 기적비(紀績碑)를 세웠다.
덕원 행적(德源 行蹟)
그러다가 익조대왕은 두만강 입구의 적도에 가까운 다른 여러 섬의 재목을 베어 만든
배 10척에 재산을 싣고 일족과 고향인 덕원으로 다시 되돌아 왔다.
때는 1290년(고려 충렬왕 16)이었다.
일찍이 목조대왕이
동북면의 덕원에서 두만강 하류변의 오동으로 이주한 1253년(고려 고종 40)으로부터 37년이 되는 해인 것이다.
익조대왕은 적도의 적(赤) 자를 따서 이름 지은 적전사(赤田社)란 곳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바로 익조대왕이 탄강한 옛 용주리(湧珠里)인 것이다.
고려시대는 일반 관리에게 준 전토(田土)는 본인의 사망과 동시에 나라에 반납하였다.
그러나 부병(府兵) 곧 방어임무의 특수 군인에게 준 전토는 영업전(永業田)이라 일컬어 세습전(世襲田)이었다.
이 영업전은 부병이 나라에서 받은 전토를 다시 양민들에게 주어 경작시켜서 다수인이 생활하게 하는 제도였다.
익조대왕은 오동땅 붉은섬에서 덕원으로 되돌아오자
곧 등주(登州 : 安邊)의 협촌(?村)이란 곳에서 영업전을 경영하면서 그곳에서 거주하였다.
익조대왕은 이를 위해 백성 30호(戶)를 등주 서쪽 15리에 살게 하였는데
후에 익조대왕의 이 영업전을 30호평(戶坪)이라 일컬었다.
아무튼 익조대왕이 경영한 이 `30호평'은
다음의 도조대왕 대에 들어가서 엄청나게 크게 번창하였던 것이다.
익조대왕의 선친인 목조대왕은 고려의 의주(宜州) 병마사로 있었고
익조대왕은 1300년(고려 충렬왕 26)에 원나라 황제의 칙명으로 승사랑(承仕郞)의 벼슬을 얻었고,
동시에 쌍성등처(雙城等處 : 永興地域)에 사는 고려 군인과 백성을 관령하였다.
또 쌍성지역의 다루카치란 막강한 관직에 있으면서 그 동북면에 끼친 바 영향력이 컸었다.
태조고황제의 증조부인 익조대왕은 9월 10일에 승하하였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익조대왕의 부인은 손부인(孫夫人)으로서
함께 적도(赤島)까지 도피하는 등 초년 고생을 함께 하였는데
이 부인이 아들 둘을 낳으니 장남은 위수(?水)요, 차남은 복(福)이라 하였다.
후에 익조대왕은 정숙왕후(貞淑王后) 최씨(崔氏)에 장가들어 도조대왕을 낳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익조대왕은 8남 1녀의 자녀를 두었고
도조대왕은 차례가 넷째이니 위로 형이 셋이요 아래로 아우가 넷인 셈이다.
그래서 손부인이 낳은 두 아들이 함녕대군과 함창대군이고
나머지 다섯 아들과 딸이 정숙왕후 소생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선원계보>에는 8 남 1녀를 전부 정숙왕후가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출처] 덕원 행적(德源 行蹟) |작성자 지식스닷컴
[ 제341호] / 등록일 : 2013.08.26 11:25:15 [이상주 종묘스토리 21]
익조대왕(翼祖大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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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조대왕(翼祖大王) / 위키백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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