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묘(墓)와 사당(祠堂)
남양주시 평내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이복동생이자 영의정을 지냈던
의안대군 양소공 이요정 이화의 묘소다.
부친은 조선 개국 후 환조로 추존된 삭방도만호 이자춘,
조부는 도조로 추존된 이춘, 증조부는 익조로 추존된 이행리다.
어머니는 이자춘의 소실이었다가 이자춘이 추존되면서 정빈으로 추존된 김씨이며
의안대군은 3형제 중 막내이지만
완풍대군 이원계, 태조 이성계와는 모두 배다른 형제들이다.
의안대군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장남 지돈녕부사 순천군 이지숭과 차남 완천군 이숙을 비롯하여 7남을 두었다.
하지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하령군 이양을 비롯한 그의 손자들은
수양대군을 보위에 올리기 위해 일어났던 계유정난에 반대하여
김종서, 황보인 등의 대신들과 함께 목숨을 잃은 인물이 많아
가문은 세조 즉위를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기도 했다. ('계유정난'이야기는 밑의 사진 밑에 올려두었다)
의안대군은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
그를 따라 1388년 위화도회군에 참여하여 회군공신에 올랐으며
이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안군에 봉해졌다.
개국 후 사회가 안정되기 전 이성계의 막내아들인 이방석이 삼봉 정도전의 추천으로 세자가 되자
개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방원은 정도전에 크게 반발하게 된다.
이러한 정도전과 이방원의 첨예한 대립 속에
의안대군은 사사로이는 조카가 되는 이방원의 편에 가담하여 1398년 소위 1차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거사를 치렀다.
거사가 성공하자 정사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이방간과 이방원의 다툼으로 일어난 2차 왕자의 난에서도 이방원을 지지하며 좌명공신 2등에 책록되기도 한다.
의안대군은 1388년 위화도 회군부터 1400년 2차 왕자의 난까지 모두 공신에 책록되어
조선 초기 사회에서 누구보다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졌었다.
그는 개국과정에서 정몽주가 주살되었을 때부터 줄곧 조카인 이방원의 편에서 활동하였으며
그 역시 종친이었기에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는 1407년 당시 영의정으로 재임하면서
세자(양녕대군)의 외숙으로 권력을 휘두르던 민무구, 민무질 형제들을 내쫓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으며
이듬해 형 이성계가 생을 마감한지 몇달 후 그 역시 형을 따랐다.
의안대군은 사후 양소(襄昭)라는 시호를 제수받았으며
태조의 묘정에 조준, 이지란, 남재, 남은 등의 개국공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
의안대군은 이성계의 이복동생으로 왕의 적자가 아니었지만 대군에까지 봉해졌으며
조선이 건국되고 안정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들에 가담하여
네차례나 공신에 올랐던 조선 초기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또한 그 역시 왕실의 사람으로 외척의 전횡에 단호하게 대처하면서 왕권강화를 위해 힘썼던 인물이기도 하다.
묘소는 평내동 평내IC 뒷산 꽤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다.
둘째 아들 완천군과 손자 하령군의 단(壇) 위쪽에 있는 의안대군의 묘소는
2014년 후손들이 새롭게 단장하여 깔끔한 모습이다.
둥근 봉분 뒤쪽으로 돌담으로 된 곡장이 감싸고 있으며
앞쪽으로 혼유석, 상석, 향로석, 장명등이 차례로 놓여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 문인석, 석마, 석양, 석호가 한쌍씩 세워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묘역에 있는 석물들은 모두 최근의 것이며 봉분 좌우로 묘표도 3기나 세워져 있다.
가장 좌측에 있는 묘표는 연꽃봉우리 모양의 머릿돌을 지니고 있어 조선 중기 이전의 것으로 보이며
앞면에는 領議政義安大君襄昭公 和之墓 라고 쓰여 있어 의안대군 이화의 묘소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묘비는 이수를 지니고 있으며 최근의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보인다.
앞면에는 開國定社佐命元勳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義安大君諡襄昭號二樂亭李公和之墓 라고 새겨져 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사당(祠堂)
분 류 : 문화재 > 유적지
지 역 : 경기도 남양주시 (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151 82-031-590-2067 )
조선 개국공신인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의 사당이다.
현재 이 사당에는 의안대군과 그의 아들 좌명1등공신 완천군, 손자 좌명 2등공신 하령군, 등
세분의 위패를 함께 모셔져 후손들이 제향하고 있다.
이화(李和)는 조선 개국공신으로 호는 이요정(二樂亭), 시호는 양소, 환조의 아들로 이성계와는 형제간이며, 어머니는 정안 옹주 김씨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하는데 협력한 종친으로서 개국 후에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의안백(義安伯)에 봉해졌다.
1398년(태조 7) `1차 왕자(방원)의 난` 때 정도전 추종세력을 평정하고 정사공신 1등으로 책봉되고
`2차 왕자(방간)의 난` 때에도 박포 일파를 평정하여 좌명공신 1등에 올라 많은 공신전을 받았으며 공신 중에서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하였다.
1407년에 영의정이 되고 대군으로 진봉 되었으며 태조의 사당에 함께 배향되었다.
이 사당은 태종의 명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전란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숙종 때 재건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다시 파괴되어 1956년고 1977년 2회에 걸쳐 보수하였다. 사
당입구에는 3문을 세웠으며 그 주변은 담장을 두르고 사당을 보호하게 했다.
3문은 맞배지붕 1간씩이고, 사당은 맞배지불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다.
한편 1986년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기념해 공신도감에서 개국공신에 이화에게 내린 녹권이 발견되어 국보 232호로 지정되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사당(祠堂)의 또 다른 이름
의안대군(義安大君) 삼대불천지위(三代不遷之位) 부조묘(不祧廟)
[약사 略史]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인 의안대군(義安大君) 諱는 화(和), 號는 二樂亭. 諡號는 양소공(襄昭公)의 사당(祠堂)으로 경기도 평내동 151번지 4호에 위치하며 1986년 4월 10일자로 남양주시 향토유적 제4호로 지정되어있다.
현재 이 사당에는 개국, 정사, 좌명공신 의안대군(義安大君)과, 그의 아들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정부찬성사 완천군 이숙 시 제의공(完川君 李淑 諡 齊懿公), 손자 좌명공신(佐命功臣) 찬성사 하령군 이양 시 충민공(河寧君 李壤 諡 忠愍公) 세 분의 위패를 함께 모셔 “삼대불천지위(三代不遷之位)”로 후손들이 묘제법에 따라 제향하고 있다.
손자 찬성사(贊成事)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은 대대(세종, 문종, 단종)로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어 단종(端宗) 1년 계유년(1453년) 계유사화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시 육종영(六宗英) 중의 하나요. 義安大君 한 가문의 16인이 계유년(1453년)과 갑술년(1454년)에 참화를 입었으니 16절사로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봉안되셨다.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에 배식되셨다.
삼대부조묘(三代不祧廟)는 가로 713센티, 가로 600센티의 맞배지붕으로 된 목조 단청 건물인데 조선 태종(1400년~1418년)명에 의해 건립되었으나 전란으로 일부 소실되어 숙종(1674년~1720년)때에 보수하였다. 이후 중건 및 재보수를 하였다. 사당입구 대문은 솟을삼문이고 그 문을 중심으로 곡장을 두르고 사당은 3단의 돌기단 위에 정면 삼칸, 측면 두칸으로 맞배지 붕목 조단청에 한식 골기와를 얹었다.
불천위(不遷位)와 부조묘(不祧廟)의 뜻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기고 죽은 사람의 신주는 오대봉사가 지난 뒤에도 묻지 않고 사당(祠堂)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허락된 신위(神位)를 불천위(不遷位)라 한다
불천위(不遷位)는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줄임말이다. 신주를 조매(祧埋)하지 않고 계속 봉사한다고 하여 부조위(不祧位)라 부르는 곳도 있으며, 불천위를 두는 사당을 부조묘(不祧廟)라고도 부른다.
불천위는 그 자손들이 있는 한 분묘와는 별도로 사당에 신위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이러한 제사를 불천위제사(不遷位祭祀) 혹은 불천위대제(不遷位大祭)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조상의 기제사(忌祭祀)는 4대까지만 봉사하고 5대부터는 혼백을 무덤에 묻고 묘사의 대상으로만 한다. 그러나 왕의 허락으로 옮기지 않아도 되는 불천지위(不遷之位), 즉, 불천위는 계속하여 신위를 사당에 모시고, 기제사는 물론 묘사나 시제(時祭)를 지낸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불천위와 그에 대한 제사는 국가나 유림, 문중에서 정하는 공훈이 있는 훌륭한 사람에 대한 예우이기 때문에 훌륭한 조상은 살아 있을 때의 지위에 따라 죽어서도 특별대우된다는 구조를 지닌다.
또한, 죽은 이의 생존시 업적이나 지위에 대한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단순한 조상숭배가 아니고 기념되거나 추도된다는 성격을 지닌다.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문중의 입장에서 보면 조정이나 유림에서 봉사할 만한 위대한 선조를 가졌다는 영예가 주어지기 때문에 문중성원들의 단결과 동질감을 강화시켜줄 뿐만 아니라 위세와 우월감을 조장시켜주기도 한다. 그래서 불천위가 있는 문중에서는 명조(名祖)를 두었다는 점을 자랑삼는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사당(祠堂)에는 (1) 개국, 정사, 좌명공신 의안대군과, (2) 그의 아들 좌명공신(佐命功臣) 의정부찬성사 완천군 이숙 시 제의공(完川君 李淑 諡 齊懿公), (3) 손자 좌명공신(佐命功臣) 찬성사 하령군 이양 시 충민공(河寧君 李壤 諡 忠愍公)까지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 삼대에 걸친 불천지위(不遷之位)의 명조(名祖)가 모셔져 있다.
그러므로 이 세 분의 위패를 함께 모신 사당(祠堂). “삼대불천지위(三代不遷之位) 부조묘(不祧廟)”라 칭하는 것이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묘역(墓域)
분류 : 문화재 유적지 / 지역 :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산97-1.
의안대군 영의정 이화(李和)의 묘는
향토유적 제4호인 의안대군 사당 뒤 쪽의 맞은 편 길 입구에 의안대군 묘소 이정표가 서 있는데
이 길로 약 650m의 가파른 공장지역을 올라가면 막다른 지점에 이른다.
이곳에 주차를 하고 철문을 나서면 바로 앞이 고속화도로 평내 I.C다.
우측으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180m쯤 가면 의안대군 묘역으로 가는 토끼굴이 나오고
이 토끼굴을 지나 평내I.C를 끼고 돌아 우측으로 올라가면
의안대군의 일곱 번째(막내) 아들인 익천군 이점(李漸)의 단소에 이른다.
그리고 좌측으로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셋째 아들 학천군 이징(李澄), 둘째 아들 완천군 이숙(李淑) 등 5분의 단소가 나온다.
이곳 단소 뒷쪽으로 또 약 100m(주차장소에서 850m) 지점에 의안대군 영의정 이화(李和)의 묘가 있다
조선 초 왕자의 난과 단종사화 등 골육상쟁으로 실전하였다가 200여년 전에 이곳에서 묘갈을 찾음으로서 실묘임을 확인하였다고 한다
참고로 같은 이름의 의안대군이 또 있는데 한문으로 "의안(宜安)대군으로 쓰며 이름은 이방석(芳碩)이다
그는 이성계의 8남으로 의안(義安)대군은 그의 숙부(叔父)가 된다
경기도 광주군 엄미리 산152번지에 묘소가 있음을 알려둔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묘역(墓域) 약사(略史)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1348~1408)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이며
태조 이성계의 親弟이고 호는 이요정(二樂亭),어머니는 정안옹주(定安翁主)김씨(金氏)이며 태종8년(1408년)에 영의정 의안대군 이화가 돌아가시니 3일 동안 철조하고 시호를 양소공(襄昭公)이라 내리시고 태종께서 빈소(殯所)에 친림(親臨)하여 제사(祭祀)를 내려주었다. 묘지는 무학대사가 태조대왕의 능터(건원릉)를 보러 오셨다 택지(擇地)하여 주셨다.
묘역은 백봉산 북측 남양주시 평내동 산97-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삼면에 곡장을 두르고 곡장안에 19개의 호석을 두른 봉분이 있으며, 호석에는 용과 호랑이를 각기 다른 형태로 교차해가며 19가지 문양을 새겨 넣었다. 이는 당시 왕릉에서도 볼수 없는 유일한 석조문양으로 꼭 보존해야 할 유형문화재이다.
묘역 좌측에는 묘비를 세웠는데 복련(연꽃좌대 78X48X24)에 비신(47X17X95)과 연꽃형 이수(66X24X48)로 되어있고 500년 전으로 추정되며 고려식이다. 비신에는 영의정의안대군양소공화지묘 라 새겨져있다.
봉분 앞에는 정방형 혼유석(93X33.5) 상석(179X119X45.5)과 장대석이 있고 그 앞에 향로석이 있고 동자석(114), 망주석(215)과 금관조복형의 문인석(117)이 있고, 중간으로 장명등과 양옆으로 마석(96X32X58), 양석(116X40X85), 호석(119X40X76)이 놓여있어 조선조 정통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위치도] 의안대군(義安大君) 묘역(墓域)과 사당(祠堂)은 평내1동 노인정앞 사거리에 있다
남양주 평내 호평역 2번출구를 나와 오른쪽방향
평내호평역 우측50m 사거리 대각선 방향에 사당이 있다
의안(義安)대군 묘 가는 길- 사당 뒷편 대로건너, 안내판 보임 (걸어가는 길)
차량은 큰 길 직진, 끝에서 좌회전 평내IC 옆길로 올라기면 됨
공장 건물 사이 가운데 길로 올라가서
토끼굴 지나
새로 단장한 묘지 안내석
진입로도 깔끔하고 넓직하게 확장되었다
의안(義安)대군 묘역 가는 길, 제일 아래쪽 첫번째 만나는 "7남 익천군 이점"의 신도비
의안(義安)대군의 7남 "이점"의 묘역 (평내동산97-3)
의안(義安)대군의 3남 "학천군 이징"과 이징의 아들 "창녕군 이의경" 의 묘
의안(義安)대군의 2남 "완천군 이숙"과
아들 "하령군 이양"과
"하을군 이확"의 묘(평내동산97-2)
"의안(義安)대군 이화" 묘역 (2014.9월 묘역 정화 작업중) 평내동 산97-1
의안대군 묘역 뒤 백봉산 정상과 팔각정
의안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 묘(墓) (완공된 모습. 2015년 촬영)
의안대군(義安大君) 신도비
의안대군 영의정 이화(李和) 묘 (예전모습)
2014년 정화사업 이전의 본래 모습도 보존하고파 여기에 옮겨둔다
계유정난(癸酉靖難) 이야기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세종·문종 때부터의 원로 신하들을 없애고 스스로 정권을 잡은 사건.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중심으로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이
반역을 모의한 것을 평정했다는 명목으로 정난이라는 말을 붙였으나
실상은 수양대군이 왕이 되려는 야심에서 이들을 제거한 정변으로,
이 해가 계유년이어서 계유정난이라 한다.
1452년 즉위할 때 단종의 나이는 12세에 지나지 않았으나,
당시로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제도로 확립되어 있지 않은 데다가
단종의 모후(母后)인 권씨도 세자빈 때 단종을 낳은 뒤 바로 죽어서
수렴청정을 할 만한 사람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문종은 죽기 전에 유언으로
영의정부사(영의정) 황보인을 비롯하여 남지(南智)·김종서 등 대신들에게 단종을 보필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단종이 즉위한 지 얼마 뒤에
좌의정 남지가 죽고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 )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상태에서 황보인·김종서 두 고명대신이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세종비 심씨의 왕자이자 단종의 숙부들인 대군(大君) 7명도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 가운데 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던 것이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으로,
안평대군의 집에는 많은 문신이 출입하고 있었고,
수양대군은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을 모사로 하여 세력을 모으고 있었다.
수양대군은 1453년 봄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明)에 다녀왔는데,
이 동안에 김종서나 안평대군 등이 그를 제거하려 한 일이 없었던 것은
이들이 단종에 반역할 의사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정변은 단종 즉위 직후부터 계획되기 시작하여
수양대군이 명에서 귀국한 뒤 뛰어난 무인 또는 문신을 본격적으로 규합함으로써 구체화되어 갔다.
그결과 1453년 10월 즈음에는 수양대군 휘하에
홍달손(洪達孫)·홍윤성(洪允成)·양정(楊汀) 등 30여 명에 이르는 정예 무인들이 모이기에 이르렀다.
수양대군은 이들 심복 무사들을 거느리고
삼정승 가운데 가장 지혜와 용맹이 뛰어난 김종서의 집을 습격하여 그를 죽이고 나서
단종에게 "김종서가 모반하여서 죽였으나,
일이 갑자기 일어나 아뢸 겨를이 없었다"고 보고하고는
곧 왕명을 빌어 고위관료들을 불러들여서 사전에 계획한 대로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의정부찬성 이양(李穰) 등
반대세력에 속하는 중신들을 대궐 문에서 죽였다.
이어서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 조수량(趙遂良) 등은 귀양을 보낸 뒤 목을 매어 죽이고,
김종서의 목을 저자에 내걸고 그의 자손을 죽였으며,
안평대군은 강화에 귀양보낸 뒤 왕명으로 스스로 죽도록 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로서 국정을 총괄하고,
겸판이병조사(兼判吏兵曹事)를 맡아 문신·무신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하는 한편
새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설치하고 이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군사권까지 독점했다.
또한 권람·홍달손·한명회 등 정변을 이끄는 주요인물과
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 등
자기 세력이 될 만한 주요관료 등 43명(수양대군 포함)을
정난공신(靖難功臣)에 책봉하고 이들을 요직에 앉힘으로써 권력기반을 다져갔다.
이같이 정변에 이어 취한 여러 조치를 바탕으로
마침내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변은 당시 재상 중심의 정치를 지향하던
정인지·최항·신숙주(申叔舟)·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之) 등
집현전 학사 출신의 관직자들까지
김종서·황보인의 권력이 비대해지는 것을 견제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된 속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정변이 난 뒤 수양대군이 권력을 독점하자
이들은 수양대군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수양대군에 반대하여 단종을 보위하려는 사람들로 나뉘게 되고,
결국 수양대군이 세조로 즉위한 뒤
1456년(세조 2) 박팽년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꾀하다 제거당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김종서의 심복 무장으로서
함길도(咸吉道) 병마도절제사로 강력한 군사력을 거느리고 있던 이징옥(李澄玉)을
정변 소식이 전해지기 전에 파직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이징옥의 반란이 나기도 하였다.→ 단종, 세조, 세조찬위
(추가 게제 )
새로 건립된
의안대군(義安大君) 신도비(神道碑)와 해설비(解說碑)
이화 문양(李和 文樣)
한 가족 한 문화재 인연맺기
- 가족과 함께하는 문화재 돌봄교실 -
(의안대군 이화 사당 / 문화재청. 남양주시. 경기문화재연구소)
남양주 주민 대학생의 리포트(Report)
"소리없이 간직한 600여년의 국보"
- 국제무역학과 200415393 이철재, 2008 건대 교양지리 이승호교수 레포트 등록일 2009-03-26 , 가격 2000원
작년 가을쯤 해서 아직 군복무중이던 때 휴가를 나와 집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길거리에 묘한 기운이 흘렀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고 웅성웅성거리는 소리들로 가득했다.
<자료 1> ...
[출처] 남양주투데이(http://www.nyjtoday.com) - 의안대군 묘소 훼손 공사 중단 촉구 (정한성 기자)
웬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머리를 깎고 피켓들이 정신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일분 일초가 아까운 휴가중에 버스에서 실컷자고 몽롱한 가운데도 왜 시위중인지 궁금한건 어쩔 수가 없었다.
피켓내용을 대충 훑어보니 ‘의안대군’의 후손인 듯한 저 아저씨들이
현대건설의 공사진행( 민자 고속도로 건설 )으로 ‘의안대군’의 묘소가 훼손된다면서 시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의안묘소’라면 집 근처에 있는 곳으로 매번 지나치기만 했지 자세히 관심을 갖지는 않던 곳이었다.
차후에 알아보니 묘소를 피하여 우회하여 고속도로 건설이 진행되었다고 했다.
내가 사는 곳의 주변을 조사해보는 ‘교양 지리’의 과제에 마땅히 부합한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가장먼저 떠오른 곳이 이곳이었다.
매번 지나치면서 한번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유적 이름 : 의안대군 사당
유적 구분 : 향토 유적
시대 : 조선 시대
위치 : 경기 남양주시 평내동 151번지
위에 보이는 사진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에 위치한 ‘의안대군 사당’이다.
몇 년 전에 국철이 근처로 지나가면서 ‘평내역’이 개통되었는데 내리자마자 바로 보이는 위치라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사당이라는 다소 구시대적은 느낌은 전혀없다. 보다시피 푸르름이 잔뜩 느껴지며 날씨까지... ...
<중략>
보다시피 푸르름이 잔뜩 느껴지며 날씨까지 화창하여 산책한다는 착각을 줄정도였다.
먼저 의안대군이 누구인지 살펴보면 의안대군 이화(李花) 조선왕조 개국 1등공신 ... ...
<후략>
"의안대군 묘소 훼손 공사 중단 촉구 결의대회" 사진과 영상은 (종중소식)에 올려져 있습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사당(祠堂)과 기(旗) 종중(宗中) /중곡동 의안빌딩
프로의 향기가 나는 멋진 사진이라 옮겨 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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