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천군 단소(鶴川君壇所)
1375(우왕 1)∼1435(세종 17). 조선 전기의 종실
의안대군(義安大君)의 3남이며 휘는 징(澄),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학천군(鶴川君)으로 봉군되었다.
의안대군(義安大君) 자손 중 성격이 가장 활달하고 무골 기질이 있어 무관의 수뇌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387년 13세에 산원(散員)에 임명되어 낭장(郎將) 장군을 거쳐 원윤을 지냈다.
1396년 (태조 05) 1월 문과에 급제했다. 정헌대부이며 공조와 형조판서를 지냈다.
1412년 (태종 12) 5월 우군총제에 임명되었고 삼군설치 후 우일번절제사로 별사금제조를 겸하였으며
1413년 (태종 12) 병마사에 임명 되었다
1414년 (태종 14) 9월 도총제로 있을 때 하절사(진하사의 부사)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7년 (태종 17) 7월 동지돈녕부사에 발탁 되었으며 이듬해 4월 좌군도총에 임명되었다.
1419년 (세종 01) 7월 표전(表箋)을 받들고 어명을 받아 명나라에 가서 황제를 알현하고 10월에 돌아왔다.
1423년 (세종 05) 5월 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2월에는 경상도 좌도병마절제사에 임명되었다.
1425년 (세종 07) 중군도총제를 거쳐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를 역임하였다.
1426년 (세종 08) 중군도총제로서 절일사(節日使)로 3월에 명나라에 다녀와서
유후사로 개성을 거쳐, 황주·평양 등지의 선위사로 돌아오기도 하였으며
1429년 (세종 06) 유후사선위사(留後司宣慰使)의 자격으로 다시 명에 다녀왔다.
1429년 (세종 11) 판좌군부사,
1432년 (세종 14) 3월 판중추원사,
1434년 (세종 16) 9월 지돈녕부사로 임명되었다.
1435년 (세종 17) 판중추부사가 되었다가8월에 별세하니
세종대왕은 군의 별세를 애석하게 여겨 조회를 2일간 정지 하고
관에서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제문을 내렸다.
묘소는 양주 누원 뒷산에 모셨으나 계유정난때 가문의 피화로 실전되어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동 의안대군 사우 경내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낸다.
완천군 이숙(完川君 李淑) 시호는 제의(齊懿)
생몰 : 1372~1406(태종6년)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차남이며 휘는 숙(淑) 시호는 제의(齊懿)이다.(完川君 李 淑 諡 齊懿公)
완천군은 부친 의안대군과 함께 태조고황제를 도와 개국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후에 숙종대왕은 이런 부자의 높은 공을 기려 `양세원훈 일문과절(兩世元勳 一門夸節)이란 친필을 내렸다.
국초(國初) (태조원년 임신년)에 응양위 전령 장군(鷹揚衛前領將軍)에 임명되었고,
1398년 (태조 7) 우부승지에 이어 좌부승지로 승진 임명되고,
1401년 (태종 1) 좌명1등공신 녹권을 받고 완천군으로 책봉되었다
1405년 (태종 5) 겨울에 완천군 이숙(李淑)으로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삼았다
석명(錫命)이 지신사(知申事)에서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로 초배(超拜)된 것은 개국(開國)이래로 없었던 일이다
1406년 (태종 6) 완천군 이숙(完川君 李淑)은 10월에 별세했으며 이 때 나이 34세였다.
조정에서는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제문을 내려 예로써 장례를 치렀다.
완전군 이숙(完川君 李 淑)은 용모와 거동이 정숙하고 우아하며, 매우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귀하고 총애를 받는다 하여 뽐내지도 않았다.
3일동안 철조(輟朝)하고, 제사를 내려 예(禮)로서 장사지내고, 시호를 추층(追贈)하여 제의(齊懿)라 하였다.
두 아들이 있으니, 하령군(河寧君)이양(李穰)과 하능군(河陵君 이확(李穫)이며 배는 정경부인 하음 봉씨이다.
묘지는 광주군 노우개 일안인데 장남 하령군 양(穰)이 계유정난에 3상신(相臣)과 함께 순절하여 실전되었다.
익천군 단소(益川君壇所)
환조대왕(桓祖大王) 이자춘(李子春)의 세째아들,
의안대군(義安大君) 이 화(李 和)의 아들이 일곱분이시니,
장남 순천군 이지숭(李之崇),
차남 완천군 이 숙(李 淑),
삼남 학천군 이 징(李 澄),
사남 영천군 이 담(李 湛)
오남 전천군 이 교(李 皎),
육남 흥천군 이 회(李 淮),
칠남 익천군 이 점(李 漸) 이다.
익천군(益川君) 이 점(李 漸)은
1399년 (정종 01) 5월1일 생원(生員)고시(考試)에 합격하였다
1412년 (태종 12) 5월3일 이점을 첨총제로 삼고
1421년 (세종 03) 공조참의에 배수되었다.
1425년 (세종 07)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總制),
1426년 (세종 08) 5월13일 이점을 부유후(副留候)로 삼고(유후 정2품),
1430년 (세종 12) 좌군총제(左軍憁制)로 전임되었으며,
1431년 (세종 13) 동지돈녕부사를 거쳐
1432년 (세종 14) 전주부윤(全州府尹) 에 임명되었다.
1433년 (세종 15) 12월18일 별세하였다
1434년 (세종 16) 2월1일 세종은 작고한 전주부윤 이점에게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세종은 왕손의 후예로서 온아, 단정한 성품의 인물로 사판(仕版 : 관리들의 명단)에 오르자
은의(恩義)를 함께 갖춘 치적을 나타냈음을 찬양하고, 그의 단명을 애도하는 교서를 내렸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길고 짧은 것이란 타고난 명이 있는지라, 이수(理數) 상도는 피하기 어려우나,
은우(恩遇)와 정의(情義)가 겸하여 높았으니, 마땅히 애영(哀榮)의 은진을 다해야 할것이다.
생각하건대 경은 그 자품이 부드러우면서 단아하였고, 지조와 품행이 단결(端潔) 방정하였도다.
왕가와 연척을 맺으매, 공손하고 근신하는 그 마음이 더욱 이더웠고,
이름이 사판(仕版)에 오르면서 충실 근면한 업적이 허다 하였도다.
이리하여 부왕께서는 결친(結親)한 은의를 높이셨고
과인(寡人)에 미쳐서는 위임하고 의중(倚重)함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남방을 절재하던 그날을 당해서는 멀리 위풍을 떨쳤으며
서도에 유후로 있을 때는 능히 어진 정사를 베풀었으니,
진실로 국가의 간성이란 중망에 상부하였고, 곧 재부(宰府)의 어진 재상이었도다.
실상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하여 왔는지라, 더욱 돈독한 보필을 기대하였더니,
어찌 잠시 잘병에 걸린 것이 갑자기 영원한 황천으로 막혔단 말인가.
홀연히 부음(訃音)을 들으니 실로 감상 애도함을 견딜 길이 없도다.
이에 예관에게 명하여 약소한 의물을 드리노라.
아아. 슬프도다. 옹용(雍容) 화목하던 정의가 시종 간격이 없었으니,
조휼(弔恤)하는 예에 유명(幽明)의 다름이 있으리오." 하노라. 하였다
장자 한산군 의산 사 직 이우경 海寧君 監務 이양우 海平君
차자 원산군 의구 부사직 진사 이사중 晉寧君 부호군 이사우 海城君
진사 이사범 晉興君
차자 예산군 인문 사 정 이임창 銀溪君 학 생 이 선 銀原君
원산군 의구 부사직 墓 江西 灘浦 (강서군 동진면)
대동강 서쪽에 있다하여 강서라 한다. 강서군 동진면 기양리 와 탄포리
진 사 이사중 晉寧君 요린(大提學)-희문-유종-보록 송화
부호군 이사우 海城君 요년(副護軍)-언필-희복-보영 제천
인서-구령-보찬 고성
-빈-보궁 평택
진 사 이사범 晉興君 무년(判 校)-숙량-수문-보일 익산
-수염-보송 함평
윤기-사진-보무 고창 영광
하령군(河寧君)
河寧君은 휘는 양(穰),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어머니는 貞敬夫人 河陰 奉氏이다. 의안대군의 적손이며 완천군의 장남이다.
일찍이 조부 의안대군의 후광을 입어 호군에 제수되어 김종서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때 맺은 인연이 훗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투철한 정신에 입각하여 계유정난 때 함께 생을 마감했다.
무과 출신으로
1423년 (세종 05) 호군을 엮임하고,
1433년 (세종 15) 옥구진병마사,
1439년 (세종 21) 8월에 의주목사,
1441년 (세종 23) 경상좌도절제사를 거쳐 9월에 중추원부사가 되었고, 10월에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444년 (세종 26) 9월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1446년 (세종 28) 6월 동지중추원사, 12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고,
1447년 (세종 29) 3월 사은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11월에 강계절제사를 제수받았다.
1451년 (문종 01)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등극하여 2월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발탁되었고,
4월 지중추원사, 7월 지돈녕부사, 10월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찬성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대왕은 공을 매우 신임하여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직하도록 하고,
대궐 문밖을 거둥할 때는 공에게 어가 뒤를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문종대왕도 승하할 때 이들을 다시 불러 어린 세자를 도와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1453년 (단종 1)에 공은 좌찬성이 되어 어린 단종대왕을 각별히 모셨지만
계유정난으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3상신과 함께 순절하였다.
고(故) 우찬성(右贊成) 하령군(河寧君) 이양(李穰)은
개국원훈(開國元勳)인 의안 대군(義安大君)의 손자로서
태종조(太宗朝) 때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등록되었고,
대대로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어 덕과 업적이 모두 뛰어났다.
결국에는 단종(端宗) 계유년(1453) 난에 목숨을 바쳤으니 당시 여섯 종영(宗英) 중의 하나이다
그의 아들과 손자, 종자(從子)와 종질(從姪)들이 함께 참화를 당했으니,
온 가문의 바른 기백이 매우 드물고 빛나서 바로 북두칠성을 달고 무지개를 뚫을 만하였으며,
의연히 살신성인(殺身成仁) 자취는 지조를 지킨 세 정승이나 여섯 신하와 비등하다.
이에 우리 숙종(肅宗)께서는
‘두 대에 걸쳐 공로를 세웠고 온 가문이 고상한 절개를 지녔다.〔兩世元勳一門夸節〕’라는
8자의 어필(御筆)을 특별히 내려서 장릉(莊陵)의 충신단(忠臣壇)에 배향(配享)하고,
또 공주(公州)의 초혼각(招魂閣)과 요당 서원(蓼塘書院)에 신주를 봉안하도록 하였다.
고 처사(處士) 남효온(南孝溫)의 저서에,
한 가문의 16명이 모두 계유년과 갑술년(1454)의 참화를 입었으니,
국조(國朝)의 종영들을 상고해 볼 때 특별히 출중하고 드러난 경우이다.’라고 하였으며,
정승 신흠(申欽)도 이르기를,
계유년과 갑술년의 변란에서 이양 등의 곧은 충성과 큰 절개가 모두 파묻힌 채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향기와 악취는 섞이기 어렵고 천리(天理)는 매우 밝은 만큼
비록 글로 기록한 것은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입은 가릴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아들 승윤과 4촌 형제 등 의안대군 자손 16인이 이때 절의를 세우다 화를 당했으니
이를 일컬어 숙종대왕은 “일문과절(一門夸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이들 형제들은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 안치되었으며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위차(六宗英位次)에 배식되었다.
고 하녕군(河寧君) 이양(李穰)에게 충민(忠愍), 1872년(고종 9)에 하령군(河寧君)으로 봉군되었고
12인에게는 시호를 내렸으니 불천위(不遷位)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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