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손자(孫子)들

정다운1004 2016. 1. 14. 14:26

의안대군(義安大君)의 손자(孫子)들

 

 

하령군(河寧君) [?~1453(단종 1)]

휘는 양(穰), 시호는 충의(忠毅_, 대군의 적손이며 완천군의 장남이다. 일찍이 조부 의안대군의 후광을 입어 호군에 제수되어 김종서와 더불어 혁혁한 공을 세웟다. 이 때 맺은 인연이 훗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투철한 정신에 입각하여 계유정난 때 함께 생을 마감했다.

1433년(세종 15) 옥구진병마사, 1439년(세종 21) 8월에 의주목사, 1441년(세종 23) 3월에 첨지중추원사, 9월에 중추원부사, 10월에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1444년(세종 26) 9월 충청도 수군도안무처치사, 1446년(세종 28)  6월 동지중추원사, 12월 공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447년(세종 29) 3월 사온사로 북경에 다녀와서 11월에 강계절제사를 제수받았다. 1451년(문종 1)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문종대왕이 등극하여 2월에 수릉관(守陵官)으로 발탁되었고, 4월 지중추원사, 7월 지돈녕부사, 10월 판중추원사에 이어 우찬성으로 임명되었다. 문종대왕은 공을 매우 신임하여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직하도록 하고, 대권 문밖을 거둥할 때는 공에게 어가뒤를 반드시 따르도록 했다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왕도 승하할 때 황보인.김종서와 공 등을 불러 세자가 몸이 약하여 염려되니 세손(단종대왕)을 잘 돌보도록 당부하였다. 문종대왕도 승하할 때 이들을 다시 불러 어린 세자를 도와 태평성대를 구가할 수 있도록 당부하였다. 1453년(단종 1)에 공은 좌찬성이 되어 어린 단종대왕을 각별히 모셨지만 계유정난으로 당시 수양대군에 의해 3상신과 함꼐 순절하였다. 또한 아들 승윤과 4촌 형제 등 의안대군 자손 16인이 이때 절의를 세우다 화를 당했으니 이를 일컬어 숙종대왕은 "일문과절(一門夸節)"이라 친필을 내렸다.

이들 형제들은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공주동학사 숙모전에 안치되었으며 특히 하령군 양은 육종영위차(六宗英位次)에 배식되었다.

1972년(고정 9)에 하령군(河寧君)으로 봉군되었고 12인에게는 시호를 내렸으니 불천위(不遷位)의 특권을 받게 되었다.


하릉군(河陵君) [ ?~? ]

휘는 확(穫), 대군의 손자이며 의정부 좌찬성인 하령군의 아우이다.

1872년(고종 9)애 하릉균(河陵君)으로 봉군되었다.

하령군이 절손됨에 따라 1등개국공신 영의정부사 의안대군 종손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돈녕도정(敦寧都正)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안씨(順興安氏)이다.


창성군(昌城君) [ ?~?]

휘는 의경(義敬), 대군의 손자이며 창성군(昌城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鶴川君)의 장남이다.

사정을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청송심씨(靑松沈氏)이다.


창선군(昌善君) [ ?~?]

휘는 근생(根生), 대군의 손자이며 창선군(昌善君)으로 봉군되었다.

1468년(세조 14) 7월에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냈으며 행 호분위 중 부사정(行 虎賁衛 中 部司正)에 이르렀다.

배위는 정경부인 낙안이씨(樂安李氏)이다.


풍안군(豊安君) [ ?~?]

휘는 효손(孝孫), 대군의 손자이며 영천군의 장남이다.

조산대부 사선 주부를 지냈으며, 증통정대부 호조참의직을 받았다.

1872년(고종 9) 풍안군(豊安君)으로 봉군되고 증 영종정경의 봉작을 받았다.


안계군(安溪君) [?~1453(단종 1)]

휘는 보인(保人), 시호는 충장(忠莊).

대군의 6남인 홍천군의 장남으로 곧 의안대군의 손자이며 안계군(安溪君)으로 봉군되었다.

일찍이 목사를 지냈으나 1453년(단종 1) 계유정난 때 4촌인 하령군과 단종대왕을 옹호하다가 아들 7형제 중 막내만 빼놓고 6인의 아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안동권씨이다.


한산군(韓山君) [ ?~1453(단종 1)]

휘는 의산(義山), 시호는 충정(忠貞), 대군의 손자로 익천군의 장남이다.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계유정난 때 의안대군파 16인 중의 한 사람으로 장남 해령군 우경(友敬)과 같이 화를 당했다.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가선대부에 추증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김해김씨이다.

2남을 두었으나 장남은 함께 화를 당하고 차남 해평군이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여양군(礪陽君) [ ?~1453(단종 1)]

휘는 승윤(承胤), 자는 장지(長之),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대군의 증손이며 6종영 중 하령군 양의 장남이다.

1453년(단종 1)에 증광시 정과(丁科)에 급제했다.

헌납 직강을 지냈으나 아버지 하령군과 동생 여평군과 세 아들이 함께 화를 당했다.

1698년(고종 9)에 여양군(礪陽君)으로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의이씨로 아들 3남을 두었는데, 장남 계조(繼祖) 차남 소조(紹祖)

삼남 장군(將軍) 3형제가 모두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이들 3형제도 모두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있다.


여평군(礪平君) [ ?~1453(단종 1)]

휘는 승효(承孝), 시호는 충숙(忠潚).

대군의 증손이요 하령군의 차남이며 여양군의 동생이다.

여평군(礪平君)으로 봉군되었다.

계유정난때 아버지, 형, 조카들과 함께 화를 당했다.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1872년(고종 9)에 시호를 받았다.

1900년(광무 4)에 9대손 경림(慶林)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왕명이 내려졌다.


순창군(順昌君) [ ?~1453(단종 1)]

휘는 승로(承老), 시호는 소민(昭愍).

대군의 증손이며 완천군의 차남하릉군의 장남이고 하령군의 조카이다.

일찍이 사마 양시에 급제했다.

1453(단종 1)계유정난 때 함께 화릉 당하여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순창군(順昌君)으로 봉해졌다.

1900년(광무 4)에 왕명으로 14대 족손 재익(在翼)으로 하여금 봉사하도록 했다.


순흥군(順興君) [ ?~?]

휘는 수로(守老), 대군의 증손(曾孫)이며 하릉군의 2남이다.

1877년(고종 9)에 순흥군(順興君)으로 봉군되었다.

대호군(大護軍)을 지냈으며 대군의 종손(宗孫)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배천조씨(白川趙氏)이다.


청릉군(靑陵君) [1426(세종 8)~1486(성종 17)]

휘는 희철(希哲), 대군의 증손이며 청릉군(靑陵君)으로 봉군되었다.

공조  형조판서를 지낸 학천군의 손자이다. 사정공부사(司正公府使)를 지냈다.

배위는 정경부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다.


문평군(文平君) [1428(세종 10)~1497(연산군 3)]

휘는 종윤(從胤), 자는 가계(可繼).

대군의 종손이며 문평군(文平君)으로 봉군되었다. 1449년(세종 31)에 문음으로 충의위에 예속되었다가

사과(司果) 호군(護軍)이 되었다. 1462년(세조 8)에 군기주부와 안주판관을 지냈다.

1497년(연산군 3) 12월에 별세했다. 37년 후인 1535년(중종 30)에 충청병마절도사인 아들 형순(亨順)이 귀하게 됨으로써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동지의금부사로 증직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성남시 율동 조부 영천군 산소 경내에 있었으나 분당 신도시 계획으로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하에 천묘하여 모셨다.


문양군(文陽君) [1431(세종 13)~1489(성종 20)]

휘는 계윤(季胤), 대군의 증손이고 영천군의 손자이며 문양군(文陽君)으로 봉군되었다. 현령을 지냈다.

묘소가 경기도 성남시 율동에 있었는데 분당 지역 도시 개발로 수용되어 충남 부여군 조촌면 추앙리 당산 아래에 이장하였다.

성남시 율동 영천군 및 그 자손들의 묘역은 사패지로 5백여 년 산지기를 두어 세일사(歲一祀)를 모시던 곳이었다.

이장시 묘를 헤쳐보니 석회를 5겹으로 싸고 8척 깊이를 내려가니 내외분의 내관과 외관이 동시제품으로 속에 ‘통훈대부 금구현령 리공지구(通訓大夫 金溝縣令 李公之柩)’라 또렷하게 먹글씨로 적혀 있었다.

염습의를 모두 벗기고 한지와 마포로 다시 개렴하여 이장했다. 훗날 문화재관리국에 알렸더니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에 연락이 되어 종중에 보관하고 있는 명주 ․ 명정 ․ 조선 ․ 통보 ․ 염주 등을 민속발물관에 기증하였다.

단국대학교 민속박물관은 이를 토대로 연구한 결과 현존하는 조선조 최고의 의상으로 밝혀졌으며 1993년 5월 2일 개관 12주년 기념 연구논문 발표회를 성황리에 가졌다.


화성군(花城君) [?~1453(단종 1)]

휘는 해(諧), 시호는 충목(忠穆).

대군의 증손이며 홍천군의 손자이고 안계군의 장남이다. 아버지와 다섯 동생과 함께 계유정난 때 화를 당했다.

일찍이 대호군을 지냈다. 1698년(숙종 24)에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화성군(花城君)에 봉해졌다.

배위는 정경부인 원주변씨로 아들 석준(碩準)과 석규(碩圭)가 살아 남아 자손들이 이어지고 있다.


화산군(花山君) [?~1453(단종 1)]

휘는 심(諶), 시호는 희민(僖愍).

대군의 증손으로 안계군의 차남이며 화성군의 아우이다. 계유정난 때 화를 당하고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었다. 화산군(花山君) 에 봉해졌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우성(遇成)이 봉사하고 있다.


화릉군(花陵君) [?~1435(단종 1)]

휘는 모(謨),시호는 희의(僖毅).

대군의 증손이며 안계군의 3남으로 16인 중에 끼어 계유정난 때 부자, 형제들과 함께 화릉 당했다.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어 있다. 화릉군(花陵君)에 봉군되었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민익(民翼)이 봉사하고 있다.


화남군(花南君) [?~1435(단종 1)]

휘는 사문(沙門), 시호는 의민(毅愍). 안계군의 4남이며 화성군의 셋째 동생이다.

계유정난때 화를 당하고 숙종대왕 때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어 있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4대 족손 인섭(仁燮)이 봉사하고 있다. 화남군(花南君)에 봉해졌다.


화평군(花平君) [?~1435(단종 1)]

휘는 주령(注令), 시호는 숙민(肅愍).

안계군의 5남이며 화성군 ․ 화산군 ․ 화릉군 ․ 화남군의 동생으로 화선군의 형이다. 또한 계유정난 때 희생되어 숙종대왕 때 신원되었다. 화평군(花平君)에 봉해졌다. 1900년(광무 4) 왕명으로 13대 족손 주만(周萬)이 봉사하고 있다.


화선군(花善君) [?~1435(단종 1)]

휘는 원상(原祥), 안계군의 6남으로 계유정난에 관계되어 안변으로 유배되었다.

화선군(花善君)으로 봉해졌으며 두 아들이 있어 대를 이어오고 있다.


해령군(海寧君) [?~1454(단종 2)]

휘는 우경(友敬), 시호는 충경(忠敬) 대군의 증손이며 대군의 7남인 익천군의 장손이고 한산군의 장남이다.

아버지 한산군과 함께 계유정난에 관계되어 1454년(단종 2)에 화를 당했다.

1698년(숙종 24) 신원되어 장릉 충신단에 배향되고 해령군(海寧君)으로 봉군되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진주강씨이다.

후손이 없어 왕명으로 12대 족손 환려(煥呂)가 봉사하고 있다.